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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디자인, 弱者를 향하다

여성·아프리카·제3세계로 눈돌린 '착한 디자인'

제가 이 자리에 맞는 인물인지 모르겠어요. 지금까지 한 번도 제가 디자이너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거든요. 이재민들에게 작은 힘이 되고 싶었을 뿐이었지요. 디자이너라니 과분하네요.”

“아닙니다. 당신이야말로 진정한 디자이너입니다. 멋진 의자나 컵을 만드는 사람만 디자이너는 아니에요. 디자인이 뭔가요. 이 세상을 더 아름답게 만드는 게 아닌가요? 그런 의미에서 당신은 분명 훌륭한 디자이너랍니다.”

▲ 자전거 헬멧이 있다해도(왼쪽) 사고는 더 늘어나고 있다. 평소엔 접혀 있다가(가운데) 충격이 가해지면 자동차 에어백처럼 부푸는 자전거 에어백이 해결책으로 제시됐다(오른쪽). 세련된 목도리 형태라 정장에 둘러도 손색없다. 스웨덴 디자이너 안나 하우프와 테레세 알스틴의 작품. /INDEX 제공

지난 9일 덴마크 코펜하겐의 복합문화공간 플레이하우스(Playhouse)에서 열린 세계적인 디자인상 '인덱스 어워드(INDEX Award)' 최종 결선 진출자 발표식장. 결선 진출 대상자로 선정돼 연사로 나선 데이비드 미켈슨 '레퓨지즈 유나이티드(Refugees United)' 대표와 닐 줄-수렌슨 인덱스 어워드 심사위원장 사이에 '과연 디자이너는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대화가 오갔다. 레퓨지즈 유나이티드는 자연재해, 입양, 전쟁 등으로 가족을 잃어버린 이재민들이 간단한 정보만으로 온라인에서 사람을 찾을 수 있는 '온라인 사람 찾기 사이트(www.refunite.org)'를 운영하는 국제 인권 단체이다. 상식적으로 디자인과는 동떨어져 보이는 인권 단체가 디자인상 후보에 올랐지만 심사위원장은 "당신이야말로 최고의 디자이너"라며 이 단체의 대표를 향해 엄지를 추켜세웠다. 혁신적인 외형 디자인이나 아이디어로 눈을 즐겁게 하는 작품을 대상으로 하는 기존 디자인상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었다.

행사를 주관한 인덱스는 2002년부터 'Design to improve life(삶을 향상시키는 디자인)'를 모토로 내걸고 형식적인 디자인에서 한걸음 나아가 새로운 시선으로 디자인의 지평을 넓히고 있는 덴마크의 비영리 디자인 기관이다. 2005년부터 2년마다 실시되는 인덱스 어워드는 디자인의 최신 흐름을 볼 수 있는 상이다. 올해는 전 세계 78개국에서 1000여개의 작품이 출품됐고 그중 61점이 결선에 진출했다. 오는 9월 열리는 '코펜하겐 디자인 위크' 기간 중 최종 수상자 5명이 가려진다. 이번 인덱스 어워드 결선 진출작을 통해 현재 세계 디자인 경향을 짚어봤다.
 

▲ 바퀴에 전기저장 스마트 자전거 - 이제 자전거도 예쁘기만 해선 안 된다. 에너지 저장기능과 GPS가 장착된 다용도 스마트 자전거‘코펜하겐 휠’. 미국인 엔지니어 마사프 비더만 작품(위). 구호 상자 잘라 접으면 축구공 변신 - 한국 디자인그룹 언플러그가 디자인한 종이 축구공. 아프리카 등에 보내지는 구호 상자를 잘라 즉석에서 만들 수 있다(아래 왼쪽). 사막 구호 텐트 겸 빗물 정화기 - 조셉 코리, 린즈 웰스 등이 디자인한 구호 텐트 왓에어(Watair). 사막 등에서 한 번에 펼 수 있고 지붕 부분엔 이슬과 빗물을 받아 정화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 /INDEX 제공

◆디자인 입고 똑똑해진 교통수단

예쁜 자전거, 멋진 자동차는 너무 흔해졌다. 이젠 근사하면서도 '똑똑한' 디자인이 교통수단에도 요구된다. 최종 결선작에 오른 '코펜하겐 휠'은 단순한 이동 수단이 아니라 각종 IT 허브 역할을 하는 'e-자전거'이다. GPS 등을 장착해 실시간으로 주변 정보를 검색할 수 있고 자전거를 타는 이들끼리 정보를 공유할 수 있게 했다. 페달을 밟거나 브레이크를 밟을 때 생겨나는 에너지를 저장했다가 필요할 경우 발전기(發電機)로 활용할 수도 있다. 전기의 힘을 빌려 자전거를 움직일 수 있어 자전거로 장거리 여행이 가능하다. 이 자전거를 디자인한 미국인 엔지니어 마사프 비더만은 "도시와 기술을 접목시키는 데 있어 디자인이 풀(glue) 역할을 했다"고 했다.

교통수단의 안전을 위한 디자인도 눈에 띄었다. '안티 스립 파일럿'은 차 속에 설치해 두고 운전자의 졸음이나 피곤 지수를 체크할 수 있는 기기. 덴마크인 토마스 그레거스가 졸음운전을 하다 큰 사고를 당한 뒤 고안한 제품이다. 자전거 인구가 늘면서 자전거 사고로 인해 다치는 수도 늘었다. 하지만 무겁고 투박한 헬멧을 쓰자니 거추장스럽다. '회브딩'은 이런 단점을 해결한 자전거용 에어백. 목에 머플러처럼 두르는 형태인데 충격이 가해지면 머리 전체를 감싸는 에어백이 펴진다.

◆디자인, 착한 교육을 향하다

기기 히비드 인덱스 대표가 올해 두드러진 트렌드로 꼽은 것은 "교육을 통해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디자인"이었다. 그중에서도 환경을 느낄 수 있도록 하는 디자인이 주를 이뤘다. 대표작인 인도네시아 발리의 '그린 스쿨'은 대나무와 태양열 에너지, 천연 진흙 등 자연 재료로 만든 교실로 아이들이 생활하는 공간 자체가 저탄소를 배우는 친환경 디자인 학습장이다. 미야 벅스턴, 필립 벡 등 이 교실을 디자인한 사람들은 환경 단체에서 일하는 평범한 사람들이다. '라이프 사이클의 비밀'이라는 이름으로 제작된 미국의 환경 학습 비디오, 어린이들이 환경·범죄 등 여러 사회 환경에 대응할 수 있는 방법을 알 수 있도록 인도의 키란 버세티씨가 디자인한 교육도구 '변화를 위한 디자인(Design for change)' 등도 이런 트렌드를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혔다.

한국 디자인 그룹 '언플러그 디자인'이 만든 '드림 볼 프로젝트'는 물품이 부족한 제3세계 국가의 어린아이를 위한 디자인으로 주목받았다. 구호 상자를 잘라 종이 축구공을 만들 수 있게 고안했다. 책꽂이나 수납 상자로 변신하는 유엔의 구호 상자도 최종 결선에 올랐다.

▲ 교통사고 방지용 '야광 히잡' - 이란의 라이카 코르시디안이 디자인한 야광 무늬를 넣은 히잡 ‘글로우 가디언’. 검은 히잡을 쓰고 다니는 중동 여성의 야간 교통사고 피해가 많은 것에 착안했다(왼쪽). 아프리카 위한 '조립식 놀이터' - 놀이터가 부족한 아프리카에서 어린이들도 쉽게 조립할 수 있게 디자인한 ‘박스 안의 상상 놀이터’. 데이비드 록웰 등 미국 디자이너 작품. /INDEX 제공

◆차가운 기술, 따뜻한 디자인을 만나다

투박한 태양열 집적기도 디자인을 만나면 한결 가볍고 상큼해진다. 영국의 크리스토퍼 호너와 데이비드 폴러가 디자인한 '유니버설 태양열 집적기'는 손바닥만한 크기로 휴대하기 쉽다. 에베레스트를 등정하는 산악가도, 전기가 부족한 아프리카에 사는 이들도 쉽게 전기를 쓸 수 있게 고안한 제품이다.

디자인을 적용한 의료용품이 많이 늘어난 것도 새로운 추세. 의료 약품이 부족한 개발도상국에서 즉석에서 작은 수술대로 활용할 수 있는 긴급구호 가방 '사마', 눈이 나빠도 시력을 제대로 잴 수 없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시력 측정용 앱 '네트라' 등이 대표적이다. 영국의 크리스 알토프가 디자인한 피부암 환자를 위한 광역학 치료 장비 '앰뷰라이트 PDT'는 입원하지 않고 패치처럼 피부에 붙여 사용할 수 있는 휴대성과 경제성에서 후한 점수를 받았다. 줄-수렌슨 인덱스 어워드 심사위원장은 "앞으로 노인 인구가 늘어 이들을 위한 디자인 의료 기기가 더 각광받을 것"이라고 했다.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는 온라인 기술도 따뜻한 디자인으로 선택됐다. 서울시가 운영하는 '다산콜센터'는 공공을 이어주는 서비스로 결선 진출작으로 선정됐다. 서울시는 이 밖에 '디자인 서울' 정책과 '청계천' 등으로 인덱스 사상 처음으로 3개의 작품을 동시에 결선에 진출시킨 도시가 됐다. 

[조선일보 비주얼 특별기획 image] 디자인, 弱者를 향하다
코펜하겐=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기사입력 : 2011.06.15 01: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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