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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디자인 혁신을 위한 곳간 채우기

얼마 전 애플이 국내 대기업을 상대로 특허 침해 소송을 제기했다. 그런데 이번 소송에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바로 기술 특허권보다 '트레이드 드레스(trade dress)'가 강조됐다는 점이다.

트레이드 드레스는 제품 디자인과 사용자 이용환경(UI) 등 상품의 외장 디자인을 일컫는다. 그동안 세계 정보기술(IT)기기 시장에서 치열하게 경쟁해온 두 글로벌 기업이 이제 '디자인'을 놓고 한판 자존심 대결을 벌이는 모양이 됐다.

두 기업 모두 1990년대 중반 이후 디자인에 대한 투자를 통해 혁신적인 제품을 선보이며 디자인 발전을 선도하고 있기 때문에 이번 소송은 세계 시장에서 디자인 전쟁을 더욱 가열시킬 것으로 전망된다.

우리나라 기업들이 디자인에 대해 본격적인 관심을 기울이기 시작한 것은 불과 10여년 전이다. 그 당시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겪으면서 기업 체질을 강화하는 수단으로 디자인을 활용하기 시작했다.

경쟁적으로 기업 내에 디자인 연구소를 만들고 디자이너를 대거 채용하는 한편 디자이너를 임원으로 발탁해 위상을 높여줬다. 10년간 디자인 투자가 300억원에서 2200억원으로 600% 이상 증가한 기업도 있다. 그 결과 IF, 레드닷 공모전 등 세계 주요 디자인상을 휩쓸고 가전, IT 기기, 자동차 등 수출 주력 제품의 세계 시장 점유율이 획기적으로 높아졌다.

아쉬운 점도 있다. 바로 중소기업이다. 중소기업은 우리 기업의 99%를 차지한다. 고용 비중도 전체 근로자수 중 88%를 웃돈다. 부가가치 창출이나 수출도 50% 내외를 점유할 정도이다. 바로 우리 경제의 버팀목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디자인 활용기업은 12%에 불과하다. 영국, 프랑스의 3분의 1 수준이다. 그나마도 활용 기업 중 68%는 연간 1억원 미만을 디자인 개발에 쓰고 있다. 중소기업 경영자 대부분이 아직도 디자인을 투자가 아닌 비용으로 여긴 결과다. 중소기업에 대한 디자인 지원이 시급한 대목이다.

다행히 최근 정부가 중소기업에 대한 디자인 지원을 골자로 한 '디자인산업육성 종합계획'을 내놓았다. 성장 가능성이 큰 중소기업을 대상으로 제품개발 전략과 디자인을 함께 지원해 준다든지, 동일 상품 군에 공동 활용이 가능한 디자인 기술개발을 지원해주는 획기적인 디자인 정책들이 포함돼 있다. 이를 위해 정부의 연간 디자인 예산도 1000억원으로 늘릴 계획이다.

사실 우리 정부의 디자인 연구개발(R&D) 예산은 200여억 원으로 지난 10년간 정체돼 있다. 같은 기간 국가 전체 R&D 예산이 200% 이상 증가한 것에 비해 디자인에 대한 투자는 우선순위에서 밀려있었다. 요즘 디자인 투자에 발 벗고 나서고 있는 중국을 보자. 베이징 시에서만 매년 5억위안을 디자인에 쏟아 붓고 있다. 우리의 3배 수준이다. 여타 동남아 개발도상국가들도 디자인에 대한 정책적 지원을 서두르고 있다.

디자인만 놓고 보더라도 우리나라는 영국, 미국 등의 디자인 선진국과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등에 업고 빠른 추격을 하는 신흥국가의 중간에 낀 '샌드위치' 형국이다. 중국의 상승세를 감안하면 디자인 분야도 결코 안심할 수 없다.

이제 디자인뿐만 아니라 산업계, 학계 등의 의견 수렴을 거친 디자인산업 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정책이 담긴 전략이 마련됐다. 문제는 정책을 성공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예산의 확보다. 디자인계뿐만 아니라 관련된 모든 분야가 힘을 합쳐야 한다.

세계 시장에서 이제 첨단 분야를 제외한 다른 분야에서 기술의 격차는 거의 없어졌다고 봐도 무방하다. 제품의 차별화는 디자인이 주도한다. 디자인이 바로 경쟁력의 척도가 된다는 말이다. 디자인 지원과 투자를 위한 곳간이 채워져야 디자인 혁신이 필요한 곳에 제때 지원이 가능하다.

[fn논단] 사설/칼럼 > 디자인 혁신을 위한 곳간 채우기/김현태 한국디자인진흥원장

기사입력2011-05-18 17:53기사수정 2011-05-18 17: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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