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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10〉 차용과 표절

“내 작품 무단도용 말라” “예술적 재구성일 뿐”
차용미술 둘러싼 ‘동상이몽’

“지금까지 예술가들의 권익을 위해 힘써 오신 분께서 제 이미지를 출처 표기도 없이 무단으로 사용하시다니 놀랍습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사진가 모튼 비비는 자신이 찍은 사진 ‘다이버’가 콜라주 작품 ‘풀’에 사용된 것을 보고 로버트 라우센버그에게 정중히 서신을 보냈다. 하지만 라우센버그는 그동안 그가 작품에 삽입하거나 변형해 넣은 자신들의 이미지를 보며 행복감과 자부심을 느낀다는 내용의 감사 서신을 수없이 많이 받아왔기 때문에 비비의 반응에 그 자신이 놀랐다는 의외의 답을 보내왔다.

◇패트릭 카리우의 사진집 ‘예스, 라스타’에 수록된 사진(왼쪽)과 해당 사진을 차용한 리처드 프린스의 ‘카날 존’ 작품. 2년 반을 끈 저작권 침해 관련 법정공방에서 패트릭 카리우가 승소했고, 내달 6일 피해 보상에 관한 논의가 이뤄질 예정이다.

라우센버그뿐만 아니라 신문, 잡지, 광고물에서 이미지를 차용해 작업하는 작가들은 이미지 차용을 기성 레디메이드 상품을 작품 제작에 활용하는 것과 같은 맥락에서 바라봤다.

반 고흐가 밀레의 그림을 모작해 자신만의 독자적인 작품을 만들어 낸 경우나, 베이컨이 벨라스케스의 그림에서 출발해 인간의 모습을 해체하는 새로운 추상표현법을 이뤄낸 것처럼 다른 작가의 작품에서 영감을 받거나 모티브를 따온 것 정도로 취급했다. 그들은 특별히 저작권과 관련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거나 생각을 했더라도 응당 공정사용의 범위에 들어간다고 여기는 듯하다.

“1949년부터 콜라주 작업을 해오고 있지만 내가 누군가의 저작권을 침해한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어요. 용제를 써 다른 매체에 옮기거나 찢어 붙이고 뒤집으면서 공감이 가는 이미지로 바꾸는 것이기 때문에 작품에 사용되는 이미지들은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와 같은 거예요. 제 작품이 다루는 시사 문제나 주변 환경을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보여줄 수 있도록 작품을 구성하는 재료 말이에요.”

◇‘무제―카우보이’(리처드 프린스, 2000년 작). 짐 크란츠가 말보로 담배 광고용으로 찍은 사진에서 배경만 조금 잘라냈을 뿐 작품의 맥락조차 바뀌지 않은 동일해 보이는 사진으로 크기만 바꿔 제작해 문제가 되었다. 작품의 저작권이 있는 필립 모리스사는 이 사실을 묵인했다.

하지만 이건 그의 입장일 뿐이다. 모튼 비비는 자신의 사진이 제값을 받기를 원했고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했다. 결국 라우센버그는 금전 보상과 함께 해당 작품 한 점을 비비에게 선물하며 그와 화해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의 작품을 통해 자신의 생각과 작품을 보여주는 차용미술 작가가 늘어나면서 ‘권리’에 관한 문제가 함께 부각되었지만 이미지의 사용을 도용이라고 믿지 않는 만큼 때때로 그들의 태도는 당당하고 거만할 때도 많다.

다른 사진가의 사진을 그대로 다시 찍거나 사진 콜라주 작품으로 활용하는 리처드 프린스는 프랑스 사진작가 패트릭 카리우 사진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사진의 시장가치 형성에 악영향을 주었다는 주장에 콧방귀를 뀌며 대답했다. 
 

◇‘일렬로 앉은 강아지’(제프 쿤스, 1988년 작). 제프 쿤스가 사진작가 아트 로저의 사진을 무단 도용해 나무로 제작한 작품. 쿤스는 부부가 강아지를 안고 있는 보편적인 구도를 참조하는 데 그쳤다고 주장했지만 제작을 의뢰하며 사진에 표현된 털과 빛의 반사된 모양까지 상세하게 지적하며 사진과 똑같이 복제해야 한다고 강조했던 사실이 조사 과정에서 드러났다.

“제 작품이 그런 류의 사진 가치나 시장 가격에 악영향을 주었을 리 없잖아요. 내 덕에 가격이 올랐으면 올랐지 내렸을 리가요.”

가고시안 갤러리는 프린스가 카리우의 사진 41점을 무단 도용해 제작한 ‘카날 존’ 시리즈 중 8점을 팔았고 한 점당 150만달러에서 300만 달러의 가격을 받아 1000만 달러가 넘는 수익을 올렸다. 그중 작가의 몫은 60%였다.

그 사이 카리우는 자신의 사진을 전시하고 싶다고 했던 뉴욕 맨해튼의 한 갤러리스트로부터 이미 다른 갤러리에서 선보인 작품을 전시할 수 없으며 리처드 프린스의 작가적 명성에 편승하려는 인상을 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그의 전시를 취소하겠다는 통보를 받았다.

◇‘두 개의 고원’(파리 팔레 로얄에 설치된 다니엘 뷔렝의 작품). 바둑판 모양의 격자구조에 260개의 줄무늬 원기둥이 설치된 형태이다.

프린스는 자신의 작품에 ‘차용’한 카리우의 이미지들은 세잔, 데 쿠닝, 피카소, 워홀에 헌정하기 위한 것으로 ‘공정사용’이 인정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그의 변명은 공감은커녕 반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성의 부족하고 어처구니없었다.

“여기 이 남자는 기타를 연주하고 있잖아요. 그가 정말 기타를 연주하는 것처럼 보이잖아요. 그가 늘 기타를 연주해 왔던 것처럼 보이게 하는 게 제 메시지가 전하고자 하는 거였어요.”

카리우는 자메이카 섬에서 고립되어 살아가는 종교집단인 라스타파리안과 함께 생활하며 그들의 신임을 얻어 사진촬영을 허락받기까지 6년의 세월을 보냈고 그렇게 모은 사진을 2000년 ‘예스, 라스타’라는 제목의 사진집으로 펴냈다. 2008년 12월 카리우는 리처드 프린스와 가고시안 갤러리, 리졸리 출판사를 고소했고 얼마 전 승소를 이끌어냈다.

작품을 제작한 작가의 권리가 어디까지 보장이 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기준은 참으로 모호해 많은 오해와 불필요한 충돌을 불러일으킨다.

프랑스의 개념미술가 다니엘 뷔렝이 ‘시각적 도구’라 부르며 공간과 형태를 해석하고 맥락을 바꾸는 데 사용하는 8.7㎝ 너비의 스트라이프는 1960년대 중반 파리 몽마르트의 한 천시장에서 구입한 줄무늬 천에서 가져온 모티브였다. 프랑스에서 차양으로 흔히 사용하는 줄무늬 천을 그림에 이용하기 시작한 뷔렝은 이 모티브를 발전시켜 다양한 재료로 여러 형태의 설치물과 공공미술에 대입시켰다.

너무나 일상적인 소재였던 차양에서 분리된 흔해빠진 줄무늬가 무한 반복되며 그만의 독자적인 이미지를 만들어냈고 많은 사람이 일정한 간격의 줄무늬 텍스처를 가진 오브제를 보면 그를 연상하게 되었다.

뷔렝은 줄무늬 모티브를 적용시킨 리옹시의 데로 광장의 분수 설계에 대한 권리를 주장하며 분수가 포함된 광장의 사진 촬영과 엽서 제작에 저작권을 지불해야 한다고 주장했고 2001년 패소했다.

◇‘풀(pull·라우센버그, 1974년 작). 모튼 비비의 ‘다이버’ 사진을 콜라주한 작품. 저작권 관련 소송으로 악명이 높은 작가는 당연히 제프 쿤스이다.

최근엔 자신의 풍선 강아지 작품과 흡사한 북앤드를 판 갤러리가 저작권을 침해했다고 주장해 빈축을 산 그는 우연히 발견한 엽서에 나온 사진대로 여러 마리의 강아지를 안고 있는 부부 조각을 만들어 법정소송에 휘말려 패소한 전력이 있다. 그는 의도적으로 엽서에 나온 저작권자의 이름을 찢고 작품 제작을 이탈리아의 조형물 제작공장에 의뢰했었다.

제프 쿤스가 자신의 유명세와 변호사 군단의 도움을 받아 저작권 놀이를 하고 있다면 리처드 프린스는 자신이 유명하지 않았다면 그냥 묻혀 지나갈 수도 있었던 일이 지나치게 확대되어 작품 활동에 피해를 보고 있다고 생각한 듯하다.

프린스는 카리우의 사진에서 도용해 만든 자신의 라스타 이미지들에 무척이나 애착을 보였다.

그는 자신의 라스타 작품이 무척이나 좋게 만들어져 기쁘지만 이번 소송을 계기로 사물을 보는 마음이 조금 위축되어 있다고 했다. 어린 시절 도벽이 있었던 그는 “난 내가 30년 전에 훔친 물건이 뭐였는지 잘 알고 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하게 생각되지 않았잖아요. 그런 것 따위엔 누구도 관심을 보이지 않죠”라며 그가 카리우의 이미지를 써주지 않았다면 그 성공하지 못한 작품은 그대로 잊혀져 지나갔을 것이라며 거만을 떨었다. 그의 말대로 그는 저작권엔 애초에 관심이 없었던 것이다.

리처드 프린스는 말보로 담배 광고를 재촬영해 작품으로 활용하기도 했는데 작품의 원작자 중 한 명인 짐 크란츠는 자신이 돈을 바라는 나쁜 맘을 먹은 사람이 아님을 극구 강조하며 작가가 작품에 ‘차용’한 이미지의 출처만 밝혀주기를 바랐다. 리처드 프린스는 그뿐만 아니라 다른 사진작가의 공개적인 비판이 담긴 요구에도 거의 무반응을 보였다. 광고사진을 제작하며 저작권을 의뢰 회사에 넘긴 사진작가들은 리처드 프린스의 도의에 기대는 것 말고는 딱히 방법이 없어 보인다.

이제 예술가는 작품을 제작할 때 본인의 작품이 저작권의 보호를 받을 수 있는지, 혹은 다른 작가의 저작권을 침해하고 있지는 않은지를 재차 확인을 하고 여러 법정장치가 만든 함정에 빠져 행여나 작품을 빼앗기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는 상황에 처한 것인지도 모른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세계일보>입력 2011.04.05 (화) 21: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