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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9〉이익과 분배 거짓과 진실

‘형이상학적 풍경의 대가’ 데 키리코
그는 왜 자신의 작품을 위작이라했나

“아, 이 그림은 제가 그린 게 아닙니다. 이건 얼간이나 속을 법한 가짜군요.”

화가가 본인이 그린 그림을 못 알아보는 일도 있을까. 나라 최고의 권위를 자랑하는 전문가들이 입을 모아 진품 판정을 내렸지만 정작 작가는 작품 앞에서 머리를 가로 저었다. 문제가 된 작품은 조르조 데 키리코의 ‘이탈리아 광장’ 연작과 동일한 소재와 구성 형식이 있었고, 색이 조금 연해보이는 것을 제외하면 연작의 다른 여느 작품과 다를 바가 없어보였다. 광장은 데 키리코가 1910년쯤부터 즐겨 그린 소재였다.

 

◇‘멜랑콜리’(조르조 데 키리코, 1912년 작). 데 키리코 이전의 많은 예술가가 그림이나 조각으로 아리아드네의 잠든 모습을 즐겨 묘사했었다. 데 키리코는 테세우스가 자신을 버리고 떠나는 사실을 모른 채 잠들어 있는 그녀의 모습을 본뜬 조각상을 멜랑콜리나 수수께끼 같은 분위기를 만드는 소재로 사용한다.

시인 아폴리네르가 ‘레 수와레 드 파리’ 지에서 극찬한 데 키리코의 ‘형이상학적인 풍경’에서 광장은 수수께끼 같은 묘한 분위기를 만들어주는 중요한 무대이다. 긴 아치형 회랑이 있는 건축물과 거대한 그림자가 침범하듯 과장된 원근법으로 표현된 건조하고 황량한 광장에는 종종 등을 돌린 정치가의 조각상이나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잠이든 아리아드네의 조각상이 등장한다. 공허한 공간에 얼굴을 알아볼 수 없는 어두운 실루엣의 작은 인물이 나타나기도 하고, 초현실적인 연극 무대에 불쑥 들어온 듯한 거대한 마네킹의 형상으로 변하기도 한다. 눈코입이 없는 둥그런 재봉용 마네킹의 얼굴이 고대 조각상의 몸에 붙어 있는 모습은 시각적으로 보이는 것 이상의 뭔가를 전달하려는 것 같은 묘한 매력을 띤다.

‘이탈리아 광장’의 진위를 밝히기 위한 법정공방은 1946년부터 9년 동안 이어지다 마침내 1955년 해당 작품에 위작판정이 내려지는 것으로 끝을 맺는 듯했으나,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2006년 작가가 세상을 떠난 지 28년 만에 다시 세상을 떠들썩하게 한다. 데 키리코 재단이 화상 알레산드로 조도를 작가의 거짓 사인을 넣은 위작을 판매하려 한 혐의로 법정에 세운 것이다. 하지만 조도는 밀라노의 역사적인 갤러리 밀리오네에서 이 그림을 구입했고, 그림에는 데 키리코 전문가 중 손꼽히는 인물이었던 파졸로 델 아르코의 감정서가 첨부되어 있었다. 밀리오네는 데 키리코의 그림을 비롯해 이탈리아 20세기 초 그림을 전문적으로 취급하는 갤러리였고, 알레산드로 조도 또한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화상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밀리오네 갤러리를 물려받은 그라치아노 기린겔리는 2000년 이 그림을 구입했다. 1955년 위작판명을 받았던 이 그림은 그동안 여러 경로를 거쳐 페르니 후작의 손에 들어갔고, 후작은 그림을 진품이라고 믿고 있었다. 밀리오네 갤러리는 후작에게서 작품을 구입하며 다베리오라는 미술평론가이자 역사가에게 자문을 구했고, 그림 제작 방법과 잘 갖춰진 매매 이력으로 미뤄보아 원본으로 생각되지만 데 키리코를 전문적으로 연구하는 파졸로 델 아르코에게 의뢰를 해 보는 것이 좋겠다는 대답을 듣는다. 그리고 파졸로 델 아르코도 역시 그 그림은 데 키리코의 그림임이 틀림없다는 소견을 내놓았다.

◇‘전투’(조르조 데 키리코, 1929년 작). 1910년쯤부터 초현실적이고 형이상학적 분위기의 건축적 그림을 그려내던 데 키리코는 1920년대 중반부터 사실적이고 낭만적인 화풍으로 방향을 전환하지만 이 변화는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그런데 그 그림은 1955년 데 키리코가 명백한 위작이라고 증언하지 않았나. 그럼 권위 있는 데 키리코 전문가들이 하나같이 실수를 한 것일까. 물론 작품을 감정한 전문가들이 부패했을 가능성을 의심하는 목소리도 나왔지만 감정서를 써준 파졸로 델 아르코는 2002년에 이미 세상을 떠난 후였다.

사실 위작을 가려내는 작업은 전문가들에게도 쉽지 않은 과정이라 서로 다른 의견이 대립·충돌하고 조율되면서 간혹 진위가 번복되기도 한다. 1993년 데 키리코와 함께 형이상학적 회화를 이끌었던 조르조 모란디의 작품집을 편찬하는 과정에서도 위작 논란이 있었다. 밀라노의 한 컬렉터는 자신이 소장한 모란디의 그림이 진품이 아니라 작품집에 포함될 수 없다는 감정위원회의 대답을 듣고 검찰에 수사를 요청했다. 작가의 누이동생인 마리아 테레사 모란디가 이끄는 조르조 모란디 작품 감정위원회에는 밀리오네 갤러리의 그라치아노 기린겔리도 포함되어 있었다. 밀리오네 갤러리의 공동창업자 중 하나였던 지노 기린겔리가 모란디의 화상이며 친구였고 손자인 그라치아노 기린겔리는 유년시절부터 모란디 가족과 함께 자라다시피 했으니 자연히 모란디 그림의 전문가로 성장한 것이다. 감정위원회는 엄격한 심사를 거쳐 밀라노 컬렉터의 그림 외에도 당시까지 모란디의 작품으로 여겨졌던 수채화 몇 점이 작품집에서 누락될 것임을 공식 발표했다. 이 결정에 동의하지 않았던 멤버가 사퇴를 감행했고, 8명의 전문가로 구성되었던 위원회는 얼마 안 가 해체되었다.

◇‘불안한 뮤즈’(조르조 데 키리코, 1918년 작). 데 키리코는 봉제용 마네킹 얼굴을 한 인물과 고대 조각상 등 연관성이 없어 보이는 소재들을 기하학적인 공간에 배치하면서 우연히 만들어지는 묘한 분위기를 즐겼다.

“모란디의 위작은 50년 전에도 상당수 유통되고 있었어요. 다만 원작이랑 차이가 커서 알아보기가 쉬웠죠.” 위작 스캔들이 터졌을 때 ‘레푸블리카’와의 인터뷰에서 마리아 테레사 모란디가 한 말이다. 하지만 위작으로 결정된 작품 중에는 밀리오네 갤러리의 판매 도장이 찍힌 수채화 작품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던 사실에 대해 그녀는 위작에 찍힌 밀리오네 갤러리의 도장이 1970년대에 사용되던 것으로 밝혀졌고, 그 당시는 아직 모란디 수채화 작품집이 공식적으로 출판되기 전이었기에 진품 구분에 오류가 생길 수 있었다는 어설픈 설명을 하는 것으로 대답을 끝냈다.

전문가가 어떤 의견을 내놓든 결국 작품을 직접 제작한 작가의 증언에 비할 바는 아니다. 고로 작가가 생존하는 때에는 위작의 구분은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현대미술로 넘어오면서 작품의 분업과 의뢰제작이 일상화되면서 작품의 진정성 문제가 다시 대두하였지만 데 키리코는 해당사항이 없다.

그런데 데 키리코의 ‘이탈리아 광장’ 위작은 도대체 어떤 이유로 진위가 가려지지 않고 반세기를 넘어 다시 물 위로 올라온 것일까. 이해의 실마리는 데 키리코의 일대기를 면밀하게 추적하고 조사한 파올로 발다치가 찾아냈다. 발다치에 따르면 1946년 당시 밀리오네 갤러리를 운영하던 지노, 페피노 기린겔리 형제와 데 키리코 사이에 문제가 있었고, 기린겔리 형제에게 심기가 뒤틀린 작가가 본인의 작품을 위작이라고 거짓 증언한 것이라고 한다. 도대체 기린겔리 형제가 어떤 실수를 했기에 심지어 9년이라는 긴 세월 동안 데 키리코가 고집을 피우게 된 것일까.

데 키리코는 1920년대 중반부터 형이상학적이고 초현실적인 스타일에서 벗어나 사실적이고 낭만적인 소재의 새로운 작품을 내놓지만 큰 호응을 받지 못했다. 사람들은 그를 ‘형이상학적인 풍경’의 작가로 기억했고 같은 유의 작품만을 요구했다. 결국 데 키리코는 원래 초기의 화풍으로 돌아가게 된다. 새로운 시도가 이해받지 못한 데 대한 노여움이나 실망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돈 욕심 때문이었을까. 1935년에서 1940년 사이에 제작한 작품에 데 키리코는 자신의 황금기였던 1912∼1915년의 연도와 사인을 해 넣었던 거다. 1940년 데 키리코는 1914년이라는 거짓 연도를 써넣은 작품 3점을 팔다가 기린겔리 형제에게 들키게 되었고, 그 때문에 사이가 틀어지게 된 것이었다. 9년을 끈 법정 싸움에서 끝까지 밝히지 않고 위작이라는 거짓 증언을 한 것이 기린겔리 형제를 골탕먹이기 위해서였는지 부끄러움 때문이었는지는 현재로서는 알 길이 없다.

◇‘아리아드네가 있는 광장’(1935∼40년 작). 1915년으로 표기되어 있다. 결국 데 키리코는 1978년 세상을 떠나던 해까지 형이상학적 초기작품을 반복해 제작하게 되고 높은 가격을 흥정하기 위해 제작 연도를 수정하기도 해 논란이 되었다.

위작판명을 받았던 이 그림은 여러 손을 거쳐 기린겔리 형제의 후계자였던 그라치아노 기린겔리의 손에 들어왔다가 다시 알레산드로 조도에게 팔린 것이었다. 2006년 거짓 사인을 한 혐의로 재판을 받은 알레산드로 조도는 이 작품이 데 키리코의 원작임을 확신하고 있었고, 다른 전문가들의 의견을 모아 그 그림이 그려진 연도를 거의 정확히 추정해냈다. 그리고 1914년이라고 되어 있는 사인을 희미하게 긁은 뒤 옆에다 1930∼40년대에 작가가 사용하던 사인 방식을 흉내 내어 그려 넣은 것이었다. 뒤틀린 전문가의 자부심이 발목을 잡은 격이었지만 작품이 위작이 아님이 밝혀지면서 그는 감옥행을 가까스로 면했다. 세상을 떠나기 3년 전 그의 작업실을 촬영한 영상 속에 잡힌 말년의 데 키리코는 여전히 시장이 원하는 그림을 그려내 주고 있었다. 작품에 사인을 하는 작가에게 왜 연도를 적지 않느냐고 질문하니 그는 순순히 숫자를 적어 넣으며 대답한다. “그건 다 비평가나 장사꾼들의 집착이 만들어낸 게지. 무슨 우표 수집도 아니고, 날짜가 왜 중요해. 작품은 작품성으로 구분해야 하는 게야.”

초현실주의의 대가로 꼽히는 마그리트, 달리 등에게 영감을 주고 이브 탕기에게는 미술 공부를 시작할 자극을 주었던 ‘형이상학적 풍경’의 대가, 조르조 데 키리코. 그는 결국 자신이 만들어낸 수수께끼 같은 무대에서 거대한 그림자에 압도된 작은 멜랑콜리적 인물처럼 한평생을 살다 갔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세계일보>입력 2011.03.22 (화) 2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