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sign Trend/산업

[장진택 디자인 읽기] 그랜저(HG)·모닝(TA)

곡선의 현대, 직선의 기아 … 이번엔 살짝 섞였네

그랜저HG현대자동차와 기아자동차가 본격적으로 ‘같지만 다른 차’를 만든 시절부터 돌아보자. 같은 골격에 같은 엔진, 같은 변속기를 나눠 쓰면서 껍데기만 달리 만들던 시절 말이다. 2004년 나란히 출시된 현대 투싼과 기아 스포티지가 좋은 예일 것이다. 당시 투싼과 스포티지는 손잡이 하나까지 다르게 생겼지만 차별성은 약했다. 투싼에서 현대차적인 것을 찾을 수 없었고, 스포티지 역시 기아차적인 무엇을 내세우지 못했던 상황이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기아차는 폴크스바겐그룹 출신의 피터 슈라이어를 영입해 ‘직선의 단순화’를 주창했다. 현대차는 캘리포니아 디자인연구소에 디트로이트 출신 디자이너들을 대거 영입해 ‘플루이딕 스컬프처(Fluidic Sculpture, 물 흐르는 듯한 조각품)’라는 디자인 철학을 만들어냈다. 피터 슈라이어는 필자와의 인터뷰에서 “‘기아(Kia)’라는 이름은 세상의 모든 자동차 브랜드 중에서 가장 짧고 단순하면서 강렬한 이름일 것”이라며 “이 같은 어감이 ‘직선의 단순화’를 떠오르게 했다”고 말했다. 반면 필립 잭 현대차 수석디자이너는 지난해 12월 열린 자동차디자인 세미나에서 “대한민국이 품고 있는 역동적인 기운과 힘찬 율동, 전통 건축이나 공예품의 형상 등에서 유연하고 역동적인 유체의 이미지을 찾아냈다”며 “특히 난초에서 연상된 힘찬 곡선이 현대차 곳곳에 스며든 것”이라고 설명했다.

현대차가 밀고 있는 역동적인 곡선과 기아차가 밀고 있는 단순한 직선은 2009, 2010년 나란히 출시된 투싼ix와 스포티지R에서 강렬하게 대비됐다. 난초 같은 곡선이 이리저리 오가는 투싼ix의 몸통은 일견 화려했다. 단순한 직선과 팽팽한 면으로 일관된 스포티지R의 몸통은 고요하게 긴장돼 있었다. 2009년 출시된 YF쏘나타와 2010년 출시된 K5의 대비도 비슷한 기조였다.

그런데 최근 잇따라 나온 현대와 기아의 ‘따끈한’ 신차에서는 다소 피가 섞인 듯한 느낌이다. 현대차의 5세대 그랜저(HG)에서는 역동적인 곡선이 다소 수그러들었다. 기아 모닝의 몸통에는 난초 비슷한 곡선히 빠르게 지나가기까지 했다. 나름 이유는 있다. 그랜저는 워낙 정중한 고급 세단이라서 자제가 필요했다. 반면 기아 모닝은 어린아이처럼 재기발랄한 경차라서 좀 ‘오버’할 필요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현대차는 새로운 그랜저를 출시하며 ‘플루이딕 스컬프처’라는 문구 외에 ‘그랜드 글라이드(Grand Glide, 웅장한 활공)’라는 장엄한 키워드를 함께 언급했다. 이로써 현대차의 디자인 관련 영문 어구는 플루이딕 스컬프처와 그랜드 글라이드 외에 바람에 날리는 실크의 모습이라는 ‘슬릭 온 다이내믹(Sleek On Dynamic)’과 바람이 만든 조형물을 뜻하는 ‘윈드 크래프트(Wind Craft)’, 6각형 그릴이라도 해도 좋을 ‘헥사고날(Hexagonal) 그릴’까지 모두 다섯 개나 된다. 반면 기아차는 ‘직선의 단순화’와 ‘호랑이 코 그릴’ 등 수수한 글귀로 일관하고 있다. 디자인을 설명하는 것에서도 현대차는 뭔가 많고 화려해 보이고, 기아차는 강하고 단순하다. ‘같지만 다른 차’가 나오고 있다는 명확한 증거다.

장진택 자동차 칼럼니스트
[중앙일보] 입력 2011.01.28 0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