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가 기억하는 퍼스트레이디 패션
지금껏 세계인의 뇌리에 남아 있는 퍼스트레이디는 자신만의 독특한 패션 스타일을 가꿔온 패션 리더였다. 이들이 입는 옷 속엔 자신이 강조하거나 부각하려는 메시지가 녹아 있다. 패션 속에 숨겨진 코드가 있다는 얘기다. ‘재키 스타일’이란 말을 유행시키며 전 세계의 패션 트렌드를 주도했던 재클린 케네디 오나시스(Jacqueline Kennedy Onasis)가 대표적인 예다. 그녀는 미국의 퍼스트레이디이면서도 미국뿐 아니라 전 세계 여성들에게 새로운 패션의 기준과 비전을 제시한 문화 아이콘이었다. 43세의 대통령과 31세의 퍼스트레이디는 1960년대 초반 베이비붐 세대가 만들어낸, 진취적이고 자유로운 사고인 뉴 프런티어(New Frontier) 정신의 대변자였다.
올레 카시니, 뉴 프런티어 정신 담아 디자인
케네디가 대통령 선거전이 한창일 때 재키의 패션이 정치 쟁점이 됐다. 1960년 패션 전문지인 WWD(Women’s Wear Daily)엔 “민주당 대통령 후보 부인인 재클린 케네디와 후보의 어머니 로즈 케네디는 프랑스 고급 맞춤의상을 구입하는 데 1년에 3만 달러 이상을 쓴다”는 기사가 실렸다. 3만 달러를 현재 가치로 따지면 18만 달러(약 21억원가량)정도 된다. 값비싼 옷을 입는 귀부인 이미지는 케네디 진영엔 정치적인 위협이 됐다. 케네디가 대통령에 당선된 뒤 재키는 프랑스 디자이너가 아닌 미국 디자이너 올레 카시니 (Oleg Cassini)에게 자신의 의상을 전담시키는 것으로 자신에게 쏟아진 정치적 위기를 타넘는다. 당시만 해도 하이패션의 중심지는 파리로 인식되던 때였다.
뉴욕·런던 등이 아직 패션의 중심지로 부상하기 전이던 시절, 재키는 프랑스 디자이너를 제치고 영화의상 전문 디자이너였던 미국 시민권자인 카시니와 함께 한편의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퍼스트레이디의 스타일을 유지하되 이전의 퍼스트레이디들이 고수했던 보수적인 패션에서 벗어나 좀 더 ‘간결하고 절제된’ 스타일이었다. 백악관의 공식 디자이너가 된 카시니는 재키를 위해 300벌의 옷을 디자인했다.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약간 부풀리되 옆으로 말아올린 여성적이면서도 모던한 헤어스타일, 단정하게 딱 떨어지는 직선적인 재킷과 신선함을 더한 7부 소매, 치밀하게 계산된 듯한 작은 모자와 클러치 백 등 이른바 재키 스타일은 해외 순방 때마다 언론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재키에게 쏟아진 언론의 각광은 프랑스 방문 때 최고조에 달했다. 당시 케네디 대통령조차 농담조로 “오늘은 내가 재클린 케네디를 수행하고 프랑스를 순방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이는 유럽의 문화와 역사에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던 미국인들에겐 승전보와도 같이 여겨졌다. 그녀의 옷이 올레 카시니라는 미국 디자이너를 통해 나왔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파리 디자이너의 옷을 카피한 복제 패션이란 오명이 붙는 미국 패션이 자립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됐다.
코튼 셔츠, 팬츠 입고 지뢰현장 누벼
미국에 재클린 케네디가 있다면 영국에는 다이애나(Diana Spencer)비가 있다. 초기 왕세자비 시절 다이애나는 풍성한 소매와 레이스 가득한 웨딩드레스, 동화책에서나 볼 듯한 모자와 망사 레이스 등으로 자신의 아름다움을 가둬놓고 있었다. 하지만 90년대 이후 그녀의 패션은 달라졌다. 전통과 보수라는 틀을 깨고 자신을 부각하는 독립적인 모습을 보여준다. 더 짧게 커트된 힘 있는 헤어스타일, 레이스나 러플 같은 장식이 사라진 깔끔한 슈트, 그리고 난민촌이나 지뢰가 묻혀 있는 전장을 방문할 때면 입는 코튼셔츠와 치노(거친 면소재의 능직으로 짠 직물) 팬츠는 이제 그녀가 더 이상 왕실의 그늘에 가려진 여성이 아닌 진취적이고 독립적인 현대 여성임을 보여줬다.
실제로 그녀의 이러한 행보 덕에 그동안 파리·밀라노·뉴욕 패션에 가려져 있던 영국 패션이 90년대 이후 다시 부흥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영국 왕립예술학교(Royal College of Arts)의 졸업 패션쇼에 참석할 만큼 패션산업에 관심이 많았던 다이애나는 ‘당당한 현대 여성 이미지=영국 패션’이라는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존 갈리아노, 알렉산더 매퀸, 스텔라 매카트니, 피비 필로 등의 영국 디자이너가 세계적인 디자이너로 등장하는 전기가 마련된 것도 이 무렵이다. 현재도 이들 디자이너 중 대다수가 디오르·지방시·셀린 등 역사와 유서가 깊은 브랜드의 디렉터로 활동하고 있으며, 왕립예술학교엔 전 세계 패션디자이너 지망생들이 몰려들고 있다.
갭·제이크루 입어 서민 이미지 부각
미셸 오바마(Michelle LaVaughn Obama)는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당선의 일등 공신으로 불린다. ‘블랙 케네디’라고 불릴 만큼 젊고 패기 있고 잘 생기기까지 한 오바마 옆을, 예전 재클린 케네디의 향수를 떠올리기에 모자람이 없는 미셸 오바마가 지키고 있다. 그녀는 패션을 통해 정치적 메시지를 던지는 방식을 택했다. 백악관의 잔디밭에서 열리는 자선행사에 흙이 잔뜩 묻은 운동화와 청바지 차림으로 등장하는가 하면, 가족과 떠난 스키 여행에서는 촌스럽기까지한 현란한 스키복으로 대중을 놀라게 했다. 그러면서도 격식이 있는 공식 석상에서는 역대 어느 퍼스트레이디 못지않은 세련됨으로 주위를 압도한다.
또한 자신의 피부톤에 맞게 원색 계열의 강렬한 색상을 즐기고, 블랙보다는 화이트를 통해 자신만의 이미지를 가꿔가고 있다. 그는 디자이너의 선택 하나에도 메시지를 담는다. 대통령 취임식 땐 미국의 쿠바계 원로 디자이너인 이사벨 톨레도의 슈트를, 취임식 무도회 때에는 대만 출신의 디자이너 제이슨 우의 드레스를 선택했다. 다민족·다인종 국가인 새로운 미국 정부의 의지를 패션으로 표현했다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대중적 브랜드인 ‘갭’이나 ‘제이 크루’ 등을 즐겨 입어 친근한 서민적인 이미지로 다가서고, 공식 석상에서는 타쿤 파니치쿨과 같은 태국계 디자이너, 나르시스 로드리게스 같은 라틴계 디자이너의 의상을 착용해 정치적인 의도를 드러내며 미국 패션의 전도사 역할을 자처하고 있다. 2009년 미국패션디자이너협회(Council of Fashion Designers of America)는 미셸에게 특별공로상을 줬다.
침착·우아한 프랑스 감성 물씬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부인인 카를라 브루니 사르코지(Carla Bruni Sarkozy)는 퍼스트 레이디 이전부터 패셔니스타였다. 90년대 린다 에반젤리스타, 나오미 캠벨, 크리스티 덜링턴 등과 같이 모델로 활약, 할리우드 스타 못지않은 부와 명성을 누린 수퍼모델 1세대다. 97년엔 가수로 데뷔했으며 2002년 낸 1집 앨범이 유럽에서 200만 장 이상 팔리는 성공을 거뒀다. 그녀는 단순히 잘나가는 수퍼모델에 안주하기에는 당차고 똑 부러진 여성이다. 주로 인권과 질병 문제에 큰 관심을 보이며 2009년 ‘에이즈·결핵·말라리아 퇴치를 위한 국제기금’의 대사를 맡아 왕성한 활동을 벌이고 있다.
그녀의 패션은 침착하고 우아하다. 이탈리아 출신이지만 일찍이 파리로 이주해서인지 프랑스적인 감성이 몸에 배어 있다. 디오르와 같은 럭셔리 브랜드를 선호한다. 그녀가 꾸준히 프랑스 럭셔리 브랜드의 최신 의상을 입는 동안 프랑스는 그 어떤 스타도 해내지 못한 스타 마케팅의 광고 효과를 실감하고 있다. 다만 퍼스트레이디로서의 명성에 자신만의 색깔이 좀 더 묻어났으면 하는 아쉬움이 지적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재키 스타일’로 모자까지 착용했던 공식 의상은 “사르코지 항공의 60년대 스튜어디스 같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태국 시리킷 왕비, 실크 사랑 각별
아시아 국가들에선 왕비나 왕세자비들이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대신하는 경우가 있다. 태국이 대표적이다. 왕실이 중심이 돼 예술·교육 발전과 빈곤 퇴치 등을 위한 태국왕실프로젝트(Thai Royal Project)를 이끌고 있다. 현 시리킷(Sirikit) 왕비가 주관하는 방사이 미술 공예 센터(Bangsai Art and Craft Center of H.M Queen of Sirikit of Thailand)는 학생들에게 23가지의 다양한 전통 기술과 예술을 가르친다. 그중 하나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한 타이 실크를 직조하는 것인데 왕비가 직접 챙길 정도로 애정이 크다. 또한 시리킷 왕비는 공식 석상에 참석할 때 늘 타이 실크로 만들어진 의상을 제작해 입는 것으로 유명하다. 액세서리 또한 보석의 산지인 만큼 사파이어·루비 등 태국을 대표하는 유색 보석을 주로 착용하고 있다.
일본 왕실도 비슷한 전통을 갖고 있다. 하버드대를 졸업한 외교관 출신인 마사코(雅子) 왕세자비가 주인공이다. 그녀는 단정하면서도 감각 있는 패션을 선보여 일본 내 엘리트 여성 패션의 본보기로 각광받으면서 마사코 열풍을 불러일으키기도 했다.
마사코 패션의 특징이자 트레이드 마크가 된 건 큼지막한 진주 귀고리다. 어떤 행사이건, 어떤 의상을 입건 간에 반드시 진주 장식을 빼놓지 않는다. 심지어 아이코(愛子) 공주와 함께 커플 룩으로 입은 패딩 점퍼 차림에서도 어울리지 않을 것 같은 진주 귀고리를 하고 나온 모습이 카메라에 포착된 적이 있다. 일본 하면 진주가 떠오르듯 자신의 작은 액세서리 하나에도 일본의 이미지를 심고 진주 산업의 우수성을 떠올리게 하는 뛰어난 마케팅인 셈이다.
이정민 기자 jmlee@joongang.co.kr | 중앙선데이 | 제167호 | 20100523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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