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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패션

럭셔리 브랜드 이야기 4. 크리스찬 디올

2차대전으로 아름다움 잊었던 여성들의 ‘욕망’을 자극하다
 

이진주 기자 세계 최고·최대의 명품회사 LVMH(루이뷔통 모에 헤네시) 그룹에는 50여 개의 럭셔리 브랜드가 포진하고 있습니다. 루이뷔통을 비롯해 크리스찬 디올·펜디·지방시·셀린느가 모두 이 그룹 소속이죠. 그룹을 먹여살리는 건 뭐니뭐니해도 루이뷔통입니다. 한데 베르나르 아르노 회장이 진짜 편애하는 브랜드는 디올이란 얘기가 있답니다. 딸의 웨딩드레스도 마크 제이콥스(루이뷔통)가 아니라 존 갈리아노(크리스찬 디올)의 것을 입혔을 정도랍니다. 도대체 디올이 어떤 브랜드기에. 지금부터 궁금증을 풀어드릴게요.

이진주 기자

크리스찬 디올, ‘신과 황금’의 이름을 가진 사내

디올 하우스의 창시자 크리스찬 디올(Christian Dior·사진)은 살아있을 때 이미 천재로 대접받은 톱 디자이너였다. 간디·스탈린 등과 함께 ‘생존인물 중 가장 유명한 5인’으로 뽑혔을 정도로 명성이 높았다. 그의 친구인 장 콕토가 “우리 시대 천재의 이름에는 신(Dieu)과 황금(Or)이 들어있다”는 말을 남길 만큼 예술가들 사이에서의 평판도 좋았다. 그는 ‘뉴 룩(New Look)’의 발명가였다. 전쟁(제2차 세계대전)으로 황폐해진 여성들에게 ‘다시 아름다워지고 싶다’는 열망을 불러일으킨 하나의 패션 혁명이었다.

무슈 디올은 1905년 프랑스 노르망디 지방의 그랑빌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는 비료 사업으로 가문의 토대를 닦았고, 아버지는 세제 개발로 부를 일궜다. 삼촌이 프랑스 무역부 장관을 지낼 정도로 명망 있는 집안이었다. 완벽하게 차려입은 어머니가 정원을 가꾸는 모습은 그의 머릿속에 강렬한 이미지로 남았다. 부모는 아들이 외교관이 되기를 소망했다. 명문 그랑제콜 ‘시앙스 포’에서 정치학을 전공하도록 한 것도 그래서였다.

그러나 디올의 꿈은 건축가가 되는 것이었다. 수업을 빼먹고 전시회를 보러 다니며 벨 에포크(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의 서유럽 문화 번영기)의 막바지를 향유했다. 1930년부터 4년 동안 아버지의 극심한 반대를 무릅쓰고 갤러리를 운영하며 달리나 브라크 등의 작품을 전시하고 예술가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업이 어려워졌고 어머니와 형제들은 연달아 세상을 떠났다. 무슈 디올은 정신질환과 폐결핵을 안고 발레아레스 제도로 요양을 떠났다. 생계를 위해 일러스트를 그리며 패션에 대한 열정을 키우던 그는, 파리로 돌아와 디자이너 피에르 발맹 등의 문하에서 일했다. 46년 12월 마흔한 살의 나이에 ‘직물의 왕’ 마르셀 부삭의 재정적 지원으로 ‘파리 8구 몽테뉴가 30번지’에 독립적인 하우스를 열었다. 이듬해 2월 첫 컬렉션에서 훗날 뉴 룩으로 명명된 ‘바(BAR) 수트’를 발표하며 일약 스타가 됐다. 50년에는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고, 57년에는 ‘타임’의 표지를 장식했다. 그해 10월 심장마비로 돌연 세상을 떠날 때까지, ‘오벌라인(허리를 풍성하게 한 디자인)’ ‘튤립라인’ ‘H라인’ ‘A라인’ ‘Y라인’을 줄줄이 내놓으며 패션계를 리드했다. 불과 10년 동안 패션 역사에 길이 남을 거장이 된 것이다.

그는 옷과 건축을 비교하는 말을 여럿 남겼다. “드레스는 여성의 몸의 비율을 향상시키기 위한 유한한 형태의 건축물과 같다” “드레스는 옷감의 흐름대로 건축된다”와 같은 말에서 구조적인 아름다움에 대한 그의 집념이 엿보인다. 무슈 디올은 ‘디테일이야말로 우아함의 정수’라고 생각했다. 전쟁의 시대, 유니폼의 시대를 지켜본 반발심으로 여성이 꽃처럼 아름다웠던 시대로 돌아가고 싶어했다. 그것은 이념이나 우열이 아니라 취향의 문제였다.

이브 생 로랑, 페레, 갈리아노 … 하우스의 후계자들

생전의 디올은 이브 생 로랑을 후계자로 점찍었다. 60년까지 디올 하우스에서 일하다 독립 레이블을 낸 이브 생 로랑은 “무슈 디올은 나에게 정수를 가르쳐줬다. 그와 있을 때 나는 가장 행복했다”고 회고하기도 했다. 이후 61~89년 마크 보앙, 90~96년 지안 프랑코 페레 등이 뒤를 이었다. 68년 헤네시 그룹이 디올 하우스를 인수했다. 지루한 브랜드로 늙어가던 디올엔 전기가 필요했다. 아르노 회장이 눈여겨본 것은 영국 출신의 ‘악동’ 존 갈리아노(사진)였다.

프랑스 패션의 자존심이던 디올을 불과 37세(60년생)의 영국인 디자이너가 이끈다는 소식에 사람들은 경악했다. 그러나 갈리아노는 84년 패션 명문 세인트 마틴 스쿨을 수석으로 졸업한 뒤 86년 이후 ‘올해의 디자이너’로 세 번이나 선정된 인물이었다. 미국 ‘보그’ 편집장 안나 윈투어의 후광을 등에 업고 아르노 회장에게 발탁돼 95년부터 지방시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해온 터였다. 그는 디올에 혁신을 가져왔다. 바 수트를 재해석했고, 코르셋을 부활시켰으며, 레오퍼드 프린트를 응용했다. 갈리아노의 디올은 우아하면서도 섹시했다. 마크 제이콥스의 루이뷔통처럼, 존 갈리아노 이후의 디올은 다시 청춘이 됐다.

아이콘과 스타 프로덕트

여성의 몸을 ‘꽃’ 으로 형상화한 47년 첫 컬렉션의 ‘바 수트’. ‘뉴 룩’이란 별명처럼 혁명적인 디자인이었다.

① 뉴 룩(New Look) 패션지 ‘하퍼스 바자’의 전설적인 에디터 카르멜 스노가 디올의 첫 컬렉션(47년 봄·여름)을 보고 “이것은 정말 혁명적이다. 너무나 새로운 스타일(New Look)”이라고 표현한 것이 그대로 이름이 됐다. 생전의 디올은 “전쟁 때문에 아마조네스 같은 옷을 입어야만 했던 여성들을 위해 부드러운 어깨와 풍만한 가슴, 꽃줄기 같은 잘록한 허리, 풍성하게 퍼지는 끝단의 스커트를 그렸다”고 말했다. 코르셋으로 몸을 조여 불편한 데다 지나치게 사치스럽다는 비판도 있었지만, 패션에 대한 욕망을 억눌러 왔던 여성들의 지지는 대단한 것이었다.

② 레이디 디올(Lady Dior) 정사각형에 가까운 양가죽 토트백에 금속으로 만든 디올의 알파벳 ‘D’ ‘I’ ‘O’ ‘R’을 참(장식용 액세서리)처럼 매단 디자인. ‘로열 레이디’인 생전의 다이애나 전 왕세자비가 이 백을 들고 있는 모습이 패션지와 타블로이드 신문을 장식한 이후 ‘레이디 디올’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③ 카나주 패턴(Le Cannage) 마름모꼴이 도드라지는 변형된 체크무늬로 ‘등나무로 엮었다’는 뜻이다. 파리 몽테뉴가 메종 디올의 의자에서 영감을 얻었다. 47년 당시부터 핸드백의 누빔과 실내장식 등에 활용됐고, 2005년부터는 화장품 패키지에도 적용하고 있다.

④ 메달리온(Le Medaillon) 원래는 초상화를 넣은 목걸이나 건축물에 쓰이는 타원형의 큰 장식을 말하는데, 무슈 디올이 아끼던 등받이가 둥근 ‘메달리온 의자’에서 따왔다. 윗부분에 ‘퐁탕주(fontange)’ 리본이 달려 있는 상징물로 변형됐다. 루이 14세 당시의 여성스럽고 우아한 궁정 분위기를 연상시키는 아이콘이다.

⑤ 미스 디올(Miss Dior)·쁘와종(Poison)·쟈도르(J’Adore) 1947년 2월 만들어진 디올 최초의 향수 ‘미스 디올’은 어린 시절의 친구인 세르주 헤플러-루이츠의 작품이다. 무슈 디올은 매주 1리터의 순수한 향수를 살롱에 뿌려 홍보했다. 그에게 향수는 ‘여성의 모습을 완성하고 의상을 마무리하는 터치’였다. 2005년엔 원조를 재해석한 ‘미스 디올 셰리’가 나왔다. 프랑스 문화부가 기획한 ‘크리스찬 디올 탄생 100주년 프로젝트’의 하나로 헌정된 것.

85년 창조된 ‘쁘와종’은 향수계의 이단아였다. ‘독(毒)’이라는 과감한 이름을 붙여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검붉은 사과 모양의 보틀에 걸맞은 농염한 향기 때문에 어느 레스토랑에는 ‘흡연 금지, 쁘와종 금지’라는 문구가 나붙기도 했다. 파리에서 도쿄까지 ‘5초에 하나씩’ 팔려나간 메가 셀러다.

99년 세기 말 등장한 ‘쟈도르’는 마사이족 여성의 길고 가는 목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황금색 보틀과 목에 황금색 링을 끼워넣은 수퍼모델 카르멘 카스의 광고로 화제를 모았다.

⑥ 홀리데이 컬렉션 ‘한정판’ 아이템의 지존으로 꼽히는 디올 코스메틱의 히트 아이템. 매년 크리스마스 즈음에 나오는데, 컬렉터까지 있을 정도다. 올해 나온 것은 클러치를 재현한 ‘미노디에르(The Minaudiere; ‘보석함’이란 뜻)’ 팔레트.

1 생전의 다이애너비가 들어 ‘완판’시킨 레이디 디올 백. 2 퐁당주 리본이 달린 메달리온. 디올 코스메틱의 상징물로 쓰였다. 3 홀리데이 컬렉션 2010 한정판 ‘미노디에르’ 팔레트. 4 최초의 향수 ‘미스 디올’을 재해석한 ‘미스 디올 셰리’. 5 마사이족의 목에서 영감을 얻었다는 ‘쟈도르’ 향수.마돈나, 샤론 스톤, 고소영 … 디올의 뮤즈들

아르헨티나의 ‘마돈나’ 에바 페론 여사는 디올 매니어였다. 가수 마돈나가 페론 여사로 분한 뮤지컬 영화 ‘에비타’는 50년대 디올의 의상과 장신구를 재현해 화제가 됐다. ‘제 2의 다이애너비 ’카를라 브루니 사르코지 프랑스 영부인은 영국을 방문할 때 디올의 의상을 선택해 ‘현명한 패션 전략’이란 찬사를 들었다. ‘영국인이 디자인한 프랑스 명품 브랜드’는 양국의 우호를 상징하는 아이콘처럼 보였던 것.

디올은 프랑스의 패션 명가란 자부심 때문인지 광고모델을 선정할 때도 자국민을 고집하는 성향이 강했다. 하나 최근엔 할리우드 여배우 샤론 스톤(미국)이나 모니카 벨루치(이탈리아), 샤를리즈 테론(남아프리카공화국), 나탈리 포트먼(이스라엘) 등 다양한 국적과 혈통·태생을 가진 모델들을 기용해 변화를 꾀한다. 로컬 모델을 활용하는 글로벌 명품 브랜드의 트렌드도 실험하고 있다. 장동건과의 결혼으로 빅 이슈가 됐던 고소영이 대표적인 사례다.

이진주 기자 [meganews@joongang.co.kr]

[뉴스 클립] 럭셔리 브랜드 이야기 <4> 크리스찬 디올
[중앙일보] 입력 2010.11.10 00:26 / 수정 2010.11.10 00: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