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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건설도 패션…외벽에 일러스트 입히면 어떨까요?

[내가 으뜸] 이미정 패션일러스트레이션협회 회장

패션지 <보그>를 펼쳐봤거나, 신세계백화점 또는 신라면세점을 지나쳐본 경험이 있는 이라면 아마 우아하면서도 역동적 패션일러스트레이션에 한번쯤 눈을 뒀을 테다. 이미정(45) 패션일러스트레이션협회장의 작품은 한국 패션일러스트레이션의 역사와 그 궤를 같이하고 있다. 그는 한국 패션일러스트레이터 1세대로 자신의 영역을 끊임없이 개척해 왔다. 20여 년에 달하는 그의 작품 중 정수라 할 만한 40여 점이 오는 30일까지 더 라인갤러리(서울 강남구 신사동)에서 전시된다. 상업논리에서 애써 벗어나려 하지 않고 그 속에서 담담하면서도 당당하게 작품을 예술로 구축해 온 그를 만났다.

패션일러스트와 운명적 만남

“어린 시절부터 별명이 ‘팔색조’였다. 하루에도 몇 번씩 옷을 갈아입었고 유치원에서 돌아오면 엄마 한복을 꺼내 입고 숄을 두르고 놀았던 기억이 난다. 늘 날 꾸미고 남들에게 보이는 걸 중요하게 여기는 아이였다. 그렇게 패션과 뗄 수 없는 학창시절을 보내다 고3이 되던 해 ‘문제’가 생기고 말았다. 공부를 해야 하는데 교복자율화가 되는 바람에 공부하는 시간을 뺏길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웃음). 다음날 학교에 입고 갈 옷을 머리부터 발끝까지 세팅해 두지 않으면 공부가 잘 되지 않을 정도였다. 공부하다가도 옷걸이에 걸어둔 옷을 힐끔힐끔 쳐다보며 힘을 얻었다.”

패션이 삶 자체였던 그는 이화여자대학교에서 동양화를 전공했다. 패션에 대한 유별난 관심은 대학시절 정점에 다다랐다.

“골라놓았던 스타킹을 밖에 나가 햇빛에 비춰 봤을 때 원하던 색이 아니다 싶으면 다시 집으로 들어와 갈아 신고 나갔다. 학교수업에 늦는 것보다 옷에 어울리지 않는 스타킹을 하루종일 신고 다니는 걸 참을 수 없었다(웃음).”

그의 이런 고집은 패션일지로까지 이어졌다. 대학 4년 내내 하루도 빠짐없이 그날의 코디를 가계부를 적듯 꼼꼼하게 적었다. 그렇게 시행착오를 겪고 원하는 스타일을 찾아내며 패션에 대한 센스를 점차 높였다. 그리고 더는 패션에 대한 열정을 접을 수 없게 되자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벨트나 단추 등 액세서리 디자인을 공부하러 갔는데 우연히 패션일러스트라는 과목을 듣게 됐다. 당시 우리나라엔 그런 용어조차 없을 때여서 호기심에 듣게 됐지만 ‘바로 이거다’ 싶었다. 물 만난 고기처럼 정말 열심히 공부했다. 게다가 동양화를 전공해 밑바탕을 잘 닦아서인지 다른 학생들에 비해 교수님의 평도 좋았다. 1989년에 한국으로 돌아와 패션디자인 전공으로 이대 대학원에 들어가 꿈을 펼칠 날만 기다렸다.”

패션일러스트 대중화에 앞장

한국에 세계적 패션지 <보그>가 들어오면서 그의 패션일러스트 작업도 본격화됐다. 패션에 관한 기획기사에 어울리는 일러스트를 그리게 됐고, 그 무렵 ‘패션 일러스트레이터’라는 직함도 생겨났다. 그래도 그때까지만 해도 패션일러스트레이션은 일부 패션 마니아들에게만 익숙한 단어였다.

패션일러스트레이션과 이미정의 이름 석 자가 대중에까지 널리 알려진 건 신세계백화점을 통해서였다.

“2000년 초반의 일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백화점에서 브로슈어를 만들 때 대개 외국여성을 모델로 사용했는데, 신세계백화점에서 최초로 그 모델을 일러스트로 바꾸는 작업을 실시했다. 보그에서 내 그림을 보고 연락했다고 하더라. 내가 정말 하고 싶던 일이라 주저없이 작업을 시작했다. ‘30대의 럭셔리한 여성을 강조하고 싶다’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따라 꿈에 그리던 의상과 여성을 쉴 새 없이 그렸다. 계절감을 잊고 살 정도로 온종일 일러스트 작업만 했던 것 같다. 그후 여러 유통업체에서 죄다 패션일러스트를 도입하며 유행이 됐을 정도로 대중화됐고, 성공적 시도로 평가 받고 있다.”

이후 패션일러스트레이션이 한국에도 뿌리 내리며 패션일러스트레이터들이 끊임없이 배출되고 있고, 그 역시 동덕여대 디자인대학 패션디자인과 전임교수로 후학을 양성하고 있다.

수많은 패션일러스트레이터들 가운데 그가 성공가도를 달리게 된 데는 여타 일러스트와 차별되는 독특한 개성이 있기 때문이다. 먹의 농담(濃淡)을 사용한 유려한 곡선, 힘이 담긴 역동적 붓터치, 그리고 당당하면서 아름다운 곡선을 그대로 드러낸 여성의 포즈다.

“사실 처음엔 수채화 물감으로 작업했다. 그러다가 한 지인이 내가 동양화를 전공한 것을 알고 수묵으로 작업해 볼 것을 권했다. 직접 해보니 내 안에 잠재된 무언가가 깨어나는 듯했다. 나는 머릿속으로 어떻게 그려야 할지 완전하게 구상한 후 한번에 그림을 그린다. 선을 그리고 그 안에 채색하면 감정을 제대로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클라이언트의 요구에 매몰되면 그림이 촌스러워지는 걸 내가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그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 여전히 고심하고 있다. 늘 초심을 간직하고 가는 게 가장 중요한 것 같다.”

건축물과도 협업해 예술성 강조하고파

당당하면서도 여성스러운 디테일이 살아있는 그의 일러스트 작품들이 꾸준히 사랑받으며 그는 여러 패션업체와 콜라보레이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엘르 골프웨어 브랜드 론칭 당시 함께했고, MCM과 코치 가방에도 그의 일러스트가 생생하게 새겨져 있다. 최근엔 그의 일러스트 작품을 프린트한 스카프를 그가 직접 제작해 좋은 반응을 얻기도 했다.

“아직 갈 길이 멀다. 과거 패션일러스트레이션을 활용한 패션상품에 관한 걸로 박사논문을 했는데 이제 실천할 때가 된 것 같다. 일러스트 캐릭터를 활용한 브랜드가 여럿 생기기도 했는데, 이제 가방이나 의류 등 패션을 넘어 침구류ㆍ펜시ㆍ도자기 등에 이르기까지 패션일러스트레이션은 무한한 부가가치를 창출할 수 있는 멋진 작업이다.”

그는 건축물 자체가 하나의 예술작품으로 인정받는 추세에 맞춰 건축물에 자신의 일러스트레이션을 활용하고 싶다는 포부도 밝혔다.

“요즘 건축물 외벽에 영상물 등을 활용해 화려해진 건축물을 자주 볼 수 있는데, 거기에도 패션일러스트를 적용할 수 있을뿐더러 건축자재에도 일러스트를 덧입힐 수 있다. 벽지나 커튼 등 인테리어로까지 가면 일러스트의 활용가치는 무궁무진하다고 본다. 일러스트와 협업을 통해 건축 자체가 패션이 될 수 있는 시대다. 특정인만을 위한 작업이 아닌, 대중의 문화수준 향상을 위해 실생활과 어우러지는 패션일러스트레이션 작업으로 발전시키고 싶다.”

글=홍연정기자 hong@ 사진=안윤수기자 ays77@

기사입력 2010-12-09 07:59: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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