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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부일시론] 디자인 실명제와 디자인 문화

/김기환 부경대 교수·건축학

최근 몇 년 사이 우리나라의 디자인 분야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왔다. 발전하였다기보다는 혁신하였다고 할 정도로 진보하였다. 포괄적인 평가이기는 하지만 핀란드 디자이니움이 2005년에 발표한 한국의 국가디자인 경쟁력은 세계 14위였다. 그런데 2008년도의 조사에서는 세계 8위 정도로 평가됐다. 올해에는 몇 개 국제평가기관의 평가가 이보다는 높을 것이라는 보고도 있다. 대개의 평가지표는 디자인의 질적 수준과 더불어 인력배출 현황, 교육기관의 숫자, 관련된 예산이나 행정조직 등을 총체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평가가 높게 나오고 있다. 디자인 강국이라 우리보다 경쟁력이 높다고 여기던 이탈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보다 높은 평가를 받고 있으니 십여 년 전과 비교하면 격세지감이 있다.

개관식에도 초청받지 못한 건축설계자

지식경제부와 디자인 관련 단체에서는 몇 년 안에 세계 5~6위를 목표로 디자인 분야를 국가산업기술혁신 2020의 한 분과로 선정하였고, 21세기 신기술의 하나로 디자인 기술(DT)을 추진하고 있다. 앞으로 디자인산업과 디자이너 육성에 예산배정도 증액하고 다양한 정책을 도입하여 국제적인 디자인과 디자이너를 육성하려고 하고 있다.

그러나 정작 디자인 결과물을 보면 디자인 우대, 디자이너 우대와는 거리가 멀다. 우리나라 국회의사당 건물 로비에는 국회의사당 건립 기록이 새겨져 있다. 규모가 크고 의미가 있는 건물이라 각 분야에 걸쳐 상당수 인사들의 이름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대부분 행정이나 정치를 하는 분들의 이름이고 정작 설계를 하고 디자인을 한 인사들의 이름은 단 한 사람만 기록되어 있다. 국회의사당은 최초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남산에 건립하고자 공모하였던 건물이다. 그 당시 30세가 안 되는 김수근 씨가 당선이 되어 건축계에 스타로 등단을 하였으나 건립이 미루어지다 대지가 여의도로 바뀌면서 재공모에 들어갔었다. 치열한 경쟁 속에 김정수를 대표 건축사로 4명의 공동 당선자를 선정하고 설계와 시공에 7년 정도가 소요된 건물이다. 그 당시 대표적인 건축가와 인테리어디자이너, 조명설계자, 조경기술자, 조각가들이 총동원된 작품이지만 그들의 이름은 어느 곳에도 없다. 마찬가지로 정부나 공공기관에서 건립한 다른 건축물도 대부분 건립에 관여한 디자이너의 이름은 기록에 없다.

최근 남산공원에 건립한 안중근기념관 개관식 때 건축설계자인 김선현, 임영환 부부건축사가 개관식 초청자 명단에서 빠지고, 의자 배정도 없이 쓸쓸히 한편에 서 있다 돌아와서 건축단체들의 분노를 사고 있다. 건축사에 대한 대우가 이 정도라면 인테리어나 조경, 야간경관, 색채 분야 등 각종 디자이너에 대한 예우는 말할 필요도 없다. 예우는커녕 속칭 업자로 대우받는 경우가 허다하다. 디자이너에게 작품성과 예술성을 요구하기보다는 경제논리에 의한 저렴한 디자인을 강요하거나 작업의 마지막 부분은 발주자 취향대로 고치는 일이 허다하다.

호주의 시드니오페라하우스 정문 앞에는 대표 설계자의 기념대를 만들어 놓았다. 기념대에는 설계 기본개념을 금속으로 입체 조각화하고 그 옆에 총괄건축가의 이름과 사인을 동판으로 만들어 놓았다. 이 기념대 하나로 문화선진국으로서의 면모를 나타내고 있다. 건물을 설계한 사람을 예우하면 건물도 그만큼 예우를 받게 되고 건축문화가 격조가 있어지게 된다.

디자인 히스토리가 담긴 실명제 도입을

핀란드의 건축가 알바알토가 디자인한 의자는 사후에도 그의 이름을 붙여 각 나라에 수출하고 있다. 미스반데르로에가 1929년 바르셀로나 만국박람회에 전시한 소파는 지금도 의자 수집가들에게 인기가 높다. 이 제품들에는 단순히 디자이너의 이름만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기본개념이나 제작 과정의 히스토리가 담겨 있어 더욱 감동을 주고 있다. 하나의 물건에 히스토리를 더하면 살아 있는 작품이 되고, 기념의 가치가 더해지게 된다.

요즈음 디자인 선진국이나 명품 제작업소에서는 디자인된 건물이나 제품 하나하나에 히스토리를 전달하면서 단순한 물질을 넘어 디자이너의 정신과 과정을 공감시키는 방법을 사용하고 있다. 우리도 건축물, 실내건축, 조명, 색채, 가구, 바닥문양, 조형장식물뿐 아니라 교량, 도시구조물에도 설계과정과 히스토리, 디자이너의 이름과 정신을 기록하여 우리 스스로 디자인 문화를 만들어가야 한다. 디자인에 시대정신이 있고 만드는 사람의 열정이 녹아 있다는 인식이 뿌리 깊게 내릴 때 비로소 디자인 강국, 디자인 문화의 탄생이 이루어질 수 있다.

| 14면 | 입력시간: 2010-12-14 [10:3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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