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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2〉앉을 수 없는 의자 1:조각적인 것

실용성 버린 의자·꽃병… 디자인 제품일까, 조각품일까

지금은 미술작품이 제작 형태나 재료, 전시 방법에 따라서 수많은 장르로 나뉘지만 조금만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더라도 미술은 크게 그림인지 조각인지만 구분하면 되었는데 그 방법은 정말 간단명료했다. 벽에 걸려 있으면 회화, 공간을 차지하고 좌대에 올라가 있으면 조각이었으니 너무도 분명해서 싱거울 정도였다.

◇‘록히드 라운지’(마크 뉴슨 1985년, 알루미늄과 유리섬유. 사진=데이먼 가렛).

사실 꽤 오랫동안 조각은 회화에 비해 부수적이고 2차적인 예술로 여겨졌다.

미국 화가 애드 라인하르트(1913∼1967)는 “조각은 그림을 잘 감상하려고 뒤로 물러서다 부딪히게 되는 것”일 뿐이라고 했고, 그 이전에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1821∼1867)는 ‘조각이 지루한 이유’라는 제목의 에세이까지 내며 조각을 회화나 건축의 보조적 위치로 나누어 정리를 해줬다.

그는 “조각은 특성상 작품을 감상할 수 있는 위치가 정해지지 않고 수없이 많기 때문에 관람자가 혼란에 빠지기 쉽지만, 회화는 작가가 작품의 감상 위치를 설정해준다”는 점에서 작가의 위상을 세워주는 우월한 예술형태라고 생각했다.

그는 “좋은 나무나 잘 다듬어진 돌은 무지한 농부도 알아볼 줄 알지만, 회화는 제작부터 감상까지 정신적인 노력과 활동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고 여겼다.

근대에 들어 로댕이 조각을 좌대에서 끌어내린 이후로 조각은 자유자재로 공간 안에서 운동감을 찾고 개념을 발전시켜 감상의 위치라는 ‘한계’ 아닌 ‘한계’를 극복해냈지만 그 이전의 조각은 특정 인물의 초상이나 묘지 조형물, 광장 기념물 등을 제외하면 건축물의 부분을 채우거나 거실이나 침실의 장식 소품 정도로 취급되기 일쑤였다.

대리석이나 청동주조가 주를 이루던 전통적인 조각 작품을 제작하는 것은 기술 이외에도 엄청난 육체적 노동과 반복적인 작업, 긴 제작 시간을 요구했다. 수백 년 전의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생각한 ‘대리석 가루를 하얗게 뒤집어쓰고 땀을 뻘뻘 흘리며 빵을 반죽하듯 일하는’ 육체노동자인 조각가의 이미지는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됐다.

그러다 20세기에 들어서 봇물 터지듯 새로운 시도들이 거의 ‘전투적’으로 시도되었다. 새로운 개념들이 미술에 도입되고 기존의 범주가 확장되면서 장르 간의 경계도 희미해지거나 무너졌다. 설치미술이라는 것이 생겼고, 환경미술·공공미술·미디어 예술과 비디오·퍼포먼스 등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아졌고 작품을 구분하는 방법도 ‘장소 특정적’인지의 여부나 사회적 기능의 유무가 중요한 요소로 대두되었다.

조각 역시 여러 다른 매체와 제작 방법을 끌어들이며 과거의 조각을 정의하던 한계를 넘어서는 ‘조각적이지 않은 조각’으로 발전해 갔다. 사실상 이제 ‘20세기에 들어서 조각을 정확히 정의하려는 시도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버린 셈이다.

조각이 조각의 한계를 극복하기를 거듭하는 동안 디자인은 실용성을 버리고 심미적인 가치에 더 가까운 전진을 하게 된다.

◇‘꽃병-바리아치오니’(안젤로 만자로티 1971년, 대리석. 사진=다비데 투리니)

#대리석으로 만든 꽃병

밀라노 출신 디자이너인 안젤로 만자로티(89)는 1970년대 초에 대리석 채석장에서 코어 샘플을 뽑아내고 남은 대리석 블록 같은 모습을 한 꽃병을 선보였다. 언뜻 보더라도 대리석의 무게가 만만찮아 보이는 꽃병이다. 꽃이 풍성하게 꽂힐 것 같지도 않고 물을 따라 내거나 닦는 데도 퍽 불편해 보인다. 꽃병의 정체성을 증명해 줄 만한 가장 기본적인 요소, 즉 문자 그대로 꽃을 꽂고 물을 담을 수 있는 기능적인 구성요소를 가까스로 만족시키는 꽃병을 닮은 어떤 오브제일 뿐이다.

대리석이라는 재료 자체로서의 아름다움과 그것을 다루는 기술, 기계가 지나간 흔적을 통해 이 ‘꽃병’이 보여주는 것은 심미적 효과를 위해 포기하고 희생하게 되는 기능적 요소와 생산효율성이다. 최근까지 그는 비슷한 맥락의 수많은 디자인 제품과 함께 다수의 조각을 제작하고 있다.

#3억에 낙찰된 알루미늄 의자

론 아라드(52)의 ‘Afterthought’는 의자이면서 기능보다는 심미적 특성에 더 신경을 기울여 제작한 작품이다. 아라드는 편의상의 이유인지, 의도적인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그것을 ‘의자’라고 부르고 있다. 알루미늄으로 광을 낸 이 의자는 2007년 파리 크리스티 경매에서 20만5000유로(약 3억원)에 팔렸다. 그의 또 다른 의자는 한 ‘조각전’에서 그 3배에 달하는 가격을 기록한 바 있다.

론 아라드뿐 아니라 다수의 유명 디자이너들이 그려내는 디자인은 예술작품만이 가지고 있던 희귀하고 ‘고가의 물건’이라는 자리를 꿰찼다. 공장에서 대량으로 찍혀 나오던 산업 디자인 상품의 이미지와는 완전 딴판이다.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디자인의 퀄리티를 가진 조각가인지, 조각가의 퀄리티를 가진 디자이너인지”를 물었을 때 론 아라드의 대답은 “별로 중요하게 생각 안 하는데, 당신한테는 그런가?”였다.

그는 “경우에 따라서 기능성을 가장 큰 목표로 삼아” 디자인하기도 하지만 때론 “형태가 더 중요해서 실용성이나 기능적인 부분이 덜 중요시되기도 한다”고 설명했다. 그래서 사람들이 그것을 사용해보고 ‘화분’이나 ‘의자’라고 부를 수도 있고 부르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정작 자신은 사람들이 그 물건을 사용할 수 있는지에는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고.

그는 “여러 가지 시도를 거쳐 새로운 재료를 시도해보고 새로운 방법을 발견하는 것을 즐기며, 디자인인지 조각인지를 구분하는 것보다는 결과물이 흥미로운지 그렇지 않은지를 더 중요하게 생각할 뿐”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탈리아에서 장인들과 함께 재료의 특성을 실험하고 공들여 작품을 제작하는데 꽤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Afterthought’(론 아라드 2009년, 알루미늄. 파리 퐁피듀센터 전시 광경. 사진=스튜디오 eLBee)

#‘가구’라는 이름의 디자인아트

2007년 10월 크리스티 런던 경매장에서는 마크 뉴슨(47)의 또 다른 ‘의자’ ‘록히드 라운지’가 디자인 작품 중 최고가(152만4750달러)를 갱신했다. 크리스티의 큐레이터가 ‘디자인아트’라는 타이틀로 ‘가구’를 선보이기 시작한 지 2년 만의 일이라고 한다. 당시 마크 뉴슨은 론 아라드와는 다르게 본인을 ‘디자이너’라고 정확하게 분류하며 ‘디자인아트’라는 표현은 “지루하고 시대에 뒤떨어졌으며, 아무런 의미가 없는 상업적인 용어일 뿐”이라고 일축했다.

하지만 BBC가 제작한 다큐멘터리에서 그는 ‘록히드 라운지’는 의자라기보다는 사실 조각 작품으로 봐야 하고 ‘의자’는 이 작품의 탄생 구실일 뿐이라고 고백한다.

우리는 여기에서 결국 상업성과 대중성, 예술성이라는 복잡한 축을 끼고 돌아가는 ‘미술시장’이라는 거대한 시스템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다.

현재 최고 인기를 달리는 디자이너들이 내놓은 생산물들의 예술적 가치를 의심하는 것은 아니지만 일반적으로 예술품의 작품성과 높은 가격 사이에는 큰 연관성은 없어 보인다.

미술계의 주요 경향을 결정짓는 요소는 여러 가지이지만, 그중 하나인 경매시장에서 ‘첫눈에 눈길을 끄는 작품들이 더 인기를 끌고 높은 가격이 책정된다는 사실’과 수익만을 목적으로 매매에 참여해 가격을 의도적으로 올리는 기관이나 기업체들이 상당수를 차지한다는 점을 이미 여러 이론가가 지적한 바 있다.

디자인과 예술의 만남은 우리에게 경쾌한 자극과 즐거움을 주지만 그 이면에 우리가 해결해야 할 문제점도 함께 가져다 준 듯하다.

이탈리아 밀라노 거주 조각·미술설치가 hojin00@gmail.com 
 
입력 2010.12.14 (화) 22: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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