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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디자인 강국, 그 경쟁력의 뿌리를 찾아서]<3>이탈리아

상식을 깬 예술을 판다


상·상·예·찬

자동차도시→유령도시→디자인도시

伊 토리노의 부활

이탈리아 북부의 토리노 시는 잘나가던 자동차 도시였다. 1899년 들어선 자동차회사 ‘피아트’ 덕분이었다. 토리노의 피아트 공장은 한때 이탈리아 자동차 생산량의 85%를 책임졌지만 1980년대 이후 생산시설 분산 정책으로 점차 규모가 줄었다.

피아트가 떠나면서 공장과 빈집이 흉물스럽게 남아 ‘유령도시’를 연상시킬 정도가 되자 토리노 시당국은 1993년 80억 달러를 들여 대대적인 도심 ‘재(再)디자인’에 착수했다. 디자인의 기본 방향은 ‘재활용’. 오랜 공업 도시로서의 역사를 증언해 주는 옛 인프라들을 관광자원으로 활용하는 것이었다. 
  
시당국은 우선 피아트 공장과 철도역 등 낡았지만 역사적 가치가 있는 건물들을 하나씩 리모델링했다. 한때 3만여 명의 일터였던 링고토의 피아트 공장 터는 1994년 쇼핑센터와 콘퍼런스센터로 변신했다. 직원의 3분의 2 이상이 떠나버린 본사의 빈 공간에는 첨단 정보기술(IT) 업체들을 유치했다.

철도와 기차역도 개선 대상이었다. 프랑스 남부와 이탈리아 밀라노 등을 연결하는 토리노는 매일 수많은 열차가 지나가는 곳이다. 이탈리아 철도공사는 시와 손잡고 소음과 진동, 경관 훼손이 심각했던 철도를 지하화했다. 그로 인해 확보한 지상 공간에는 공원과 주택, 사무실을 지었다.

도시 재디자인이 가져온 효과는 당초 기대를 뛰어넘었다. 토리노 시에 따르면 1996년부터 2006년까지 관광객이 연평균 60%씩 증가했다. 특히 피아트 공장 터에 조성한 쇼핑센터와 공연장이 가장 인기인 것으로 조사됐다.

무스 아카데미, 마랑고니 디자인스쿨, IED(Istituto Europeo di Design), NABA(Nuova Accademia di Belle Arti Milano)…. 전 세계의 디자인 전공 학생들을 설레게 만드는 이름들이다. 이 네 학교를 비롯해 이탈리아 밀라노에 있는 디자인 전문학교들은 대부분 80% 이상의 취업률을 자랑한다. 매년 1000여 명에 이르는 한국인 유학생들이 이탈리아 밀라노를 찾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 같은 성과를 가능하게 하는 밀라노 디자인 교육의 강점은 무엇일까.

○ ‘실전’을 통해 배운다

[사진 ▶]이탈리아 밀라노의 디자인 전문학교들은 기업들과 함께 학기 중 디자인 프로젝트를 진행한다. 도무스 아카데미(위)와 마랑고니 디자인스쿨(왼쪽) 학생들은 두 달 남짓 연구한 아이디어를 기업에 제공한다. 아래 사진은 도무스학생들이 자동차회사 폴크스바겐과 아우디에 제출한 샘플.

해답을 찾기 위해 지난달 7일 밀라노 시내의 도무스 아카데미를 찾았다. 1982년 개교했고 이탈리아에서 처음으로 국제디자인 석사과정을 개설한 학교다. 무엇인가 오리고 만들고 있을 것이란 예상과 달리 학생들은 열띤 토론 중이었다. 노트북컴퓨터와 연습장에는 거친 스케치 작업이 한 가득이었다. 바르바라 트레비츠 패션학과장은 “‘기업 연계 프로젝트’ 발표를 하루 앞두고 마지막 점검 작업 중”이라고 설명했다.

도무스의 학생들은 1년에 8번 이상 글로벌 기업들에 상상력과 아이디어를 판다. 기업들은 새로운 사업 분야에 도전하거나 신제품을 개발하기에 앞서 기본 아이디어 및 콘셉트에 대한 조언을 학교에 요청한다. 국내 유명 대기업은 독일 자동차업체 아우디는 ‘덜 독일적이면서 마초스럽지 않은 디자인’이라는 구체적인 주문을 해왔고 경쟁사인 폴크스바겐은 ‘이제까지 존재하지 않았던 럭셔리한 디자인’이라는 커다란 주제를 던지기도 했다.

학생들은 길게는 두 달 가까이 연구한 아이디어를 회사에 제공하고 인턴 직원에 해당하는 보수를 받는다. 알베르토 보니솔리 학장은 “입학 후 첫 학기 동안은 인문학과 심리학, 인류학 등 창의성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다양한 학문을 접하게 한다”며 “그 이후부터는 모든 수업이 기업과 함께하는 프로젝트 형태로 진행된다”고 설명했다.

다음 날 찾은 마랑고니 디자인스쿨에서도 비슷한 커리큘럼이 진행 중이었다. 패션 디자인으로 유명한 이 학교는 패션의 도시 밀라노에서도 가장 트렌디하다는 몬테나폴레오네 거리 한복판에 있었다. 교문 양 옆으로 ‘루이뷔통’과 ‘프라다’, ‘돌체앤가바나’ 등 세계적 명품 패션업체 매장 100여 개가 화려한 쇼윈도를 자랑하고 있었다.

학교에 들어서자 복도와 강의실의 빈 공간마다 널려 있는 옷과 액세서리, 가방들이 눈에 띄었다. 패스트패션 업체 ‘자라’나 ‘유니클로’부터 하이브랜드 ‘구찌’와 ‘보테가베네타’ 등에 제출하기 위해 학생들이 직접 제작한 작품들이다. 학교의 홍보책임자인 마르코 무자노 씨는 “학생들은 1년에 7개 패션업체와 손잡고 ‘협동 프로젝트’를 수행한다”며 “프로젝트가 끝날 때쯤 회사들이 눈여겨봤던 학생들을 채용하기 때문에 매년 취업률이 90% 이상을 기록한다”고 말했다.

○ 매달 바뀌는 교수진

글로벌 기업들이 밀라노 디자인학교 학생들의 실력과 수준을 믿고 작업을 맡기는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실제 산업현장에서 뛰는 전문 디자이너들이 강사를 맡기 때문이다.

도무스 아카데미에는 정교수의 개념이 아예 없다. 학교는 특정 기업 프로젝트를 시작할 때마다 관련 분야 전문가인 현직 디자이너를 찾아가 강의를 요청한다. 이 학교 출신으로 이탈리아에서 디자이너로 활동하는 여미영 씨는 “밀라노의 디자인학교들은 대부분 철저한 도제식 수업을 고집한다”며 “밀라노 디자인 업계에는 ‘일할 능력이 되는 사람은 일을 시키고 일할 능력이 부족한 사람은 가르쳐라’라는 격언이 있는데 이런 도제식 수업을 반영하는 격언이다”라고 설명했다.

세계적 산업 디자이너인 스테파노 조반노니 씨, ‘크리스티앙 디오르’ 출신 다니엘라 푸파 씨 등 유명 디자이너들도 기꺼이 바쁜 시간을 쪼개 ‘프로젝트 리더’를 맡는다. 주어진 기간에 학생들은 교수가 아닌 ‘리더’와 함께 아이디어를 다듬는다.

마랑고니에서는 프로젝트 기업의 책임 디자이너가 직접 강사로 나선다. 학생들에게 그해 디자인 테마와 선정 이유 등에 대해 상세하게 설명해 주고 학생들이 제출하는 아이디어를 보완해 준다. 마랑고니와 더불어 양대 패션학교로 불리는 IED에서도 프라다와 조르조 아르마니 등의 수석 디자이너들이 수업을 진행한다.

“박물관-미술관이
어린이 디자인 교실”


“이렇게 단단한 찰흙 덩어리를 어떻게 하면 부드럽게 만들 수 있을까.”

지난달 9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디오체사노 박물관 안에 있는 작은 교실에서 알렉산드라 구트리엘로 씨가 수업을 시작했다. 교실에는 부활절 방학을 맞아 학교 대신 박물관으로 ‘등교’한 6∼12세 학생 25명이 찰흙을 한 덩어리씩 손에 쥐고 있었다.

[◀ 사진]밀라노 어린이들에게 디자인은 가장 즐거운 ‘놀이’ 중 하나다. 지난달 9일 밀라노 디오체사노 박물관에서 열린 디자인 수업에 참가한 학생들이 찰흙으로 로마시대 기름램프를 만들고 있다.

아이들은 소매를 걷어붙인 채 각자 생각하는 답을 외쳤다. “주먹으로 쾅쾅 쳐요.” “저는 손바닥으로 평평하게 밀래요.” 구트리엘로 씨는 아이들이 찰흙을 마음껏 탐구하고 자유롭게 생각할 수 있도록 30분가량 기다렸다. “손바닥으로 누르면 찰흙 속 물기가 금방 마른단다. 손가락 끝으로 살짝 만지면 나중에 덜 딱딱해지겠지?” 수업 중 구트리엘로 씨가 아이들에게 가르쳐준 내용은 이것뿐이었다.

밀라노의 박물관이나 미술관에선 이런 어린이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미취학 아동과 초등학생을 대상으로 여는 ‘디자인 수업’이 많기 때문이다. 이런 수업 덕분에 어린이들은 박물관과 미술관을 따분한 곳이 아니라 즐거운 놀이터로 여긴다.

이날 수업에 참여한 아이들에게 주어진 과제는 오전에 관찰한 로마시대 기름 램프를 만들어보는 것. 재료는 찰흙 한 덩어리뿐이었지만 어쩔 줄 몰라 당황하거나 교사에게 의지하려는 아이는 없었다. 피에트로 마레스카 군(8)은 “방학 동안 옛날 사람들이 쓰던 물건을 많이 봤어요. 나는 로마 사람들이랑 조금 다르게 손톱을 이용해 디자인할 거예요”라고 말했다. 이 수업을 운영하는 민간기업 아드아르템의 엘레나 로시 씨는 “아이들은 오전 중 유물이나 그림을 관찰하고 오후에는 비슷한 작품을 만들어본다”며 “예술이 어려운 공부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생활의 일부임을 가르치는 교육”이라고 설명했다. 

동아일보 2010-05-27
http://news.donga.com/3/all/20100527/2863714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