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Design Trend/환경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1> 튀빙겐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1> 튀빙겐 - 도시는 주민이 만드는 것
입주민 10~20가구 '건설공동체' 조직… 재개발 주체로 나서
공동주택 저마다의 멋… 도시에 개성·활기 가득
구성원들 공통과제 함께 풀며 이웃 간에 소통과 화합 이뤄
새 도시개발법 독일 전역으로 확산

튀빙겐= 글ㆍ사진 이훈성기자 hs0213@hk.co.kr 


로레토 지구 광장에 조성된 수로에서 아이들이 어울려 놀고 있다. 광장의 폭은 왕복 차선을 만들 수 있을 만큼 넉넉하지만, 차보다 보행자를 우선 배려한다는 원칙 아래 온전히 주민들을 위한 공간으로 꾸며졌다. 이석정 한양대 교수 제공 
 
지방자치단체에서 재개발 기본 계획을 세우고 구역을 정한다, 구역 내 부동산 소유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시공사를 선정한다, 대개 대형 건설사인 시공사는 모든 기존 건물을 철거한 뒤 주거 단지를 조성한다, 그새 치솟은 집값을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 주택과 상가를 분양 받는다. 한국에서 그간 흔히 이뤄진 재개발 방식이다. 상업적 이해를 앞세우는 대형 건설사 주도의 한국형 재개발은 용산참사라는 파국을 부른 세입자 보상 갈등, 용적률을 높이는 데 치중한 고층 아파트 일색의 획일적 주거 형태, 과도한 집값 상승에 따른 개발 이익이 건설사와 투기꾼 등 소수에게 집중되는 문제 등 갖은 난맥상을 드러냈다.

독일 남서부 바덴뷔르템베르크 주에 있는 튀빙겐 시가 1991년부터 진행 중인 남부 지역 재개발은 건설회사가 아니라 실제 이곳에 입주할 사람들이 개발 주체가 된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튀빙겐을 좌우로 관통하는 네카어 강의 이남으로, 현지에선 튀빙겐 쥐트슈타트(Suedstadtㆍ남쪽 도시)로 불리는 이 지역의 재개발 방식을 특징 짓는 개념은 건설공동체(Baugemeinshaft). 공동주택을 함께 지어 살기로 한 주민들의 조합인 이 조직은 보통 10~20가구로 구성돼 직접 시로부터 토지를 구매하고 건축가에게 자신들이 원하는 주택의 설계와 건축을 의뢰한다.

재개발 대상지가 약 60만㎡으로 서울의 중간 규모 뉴타운과 비슷한 넓이인 튀빙겐 남부에선 150여 개의 건설공동체가 총 면적의 85%를 개발했고 건설회사가 담당한 구역은 15%에 불과하다. 이곳에서 처음 시도된 건설공동체 중심의 재개발은 이후 독일 전역에서 일반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예전 독일의 주거지역 개발은 일부 부유층이 알짜배기 땅에 단독주택을 짓고 남은 토지를 개발사업자가 사들여 공동주택을 분양하는 방식이었다.

크게 다섯 지구로 나뉘는 튀빙겐 남부 재개발 지역 중 면적이 넓은 곳은 서쪽 로레토 지구(Loretto-Areal)와 동쪽 프란쬐지쉐스 지구(Franzosisches Viertel)다. 지난 14~15일 찾아간 이들 지구는 한국의 여느 주택 단지와는 확연히 달랐다. 가장 비교되는 것은 이곳엔 아파트가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건물은 1층에 상가가 입주해 있는 3, 4층짜리 공동주택이고 5층을 넘는 고층 건물은 전혀 없었다.

튀빙겐 남부 재개발 지역에 속해 있는 프란쬐지쉐스 지구.

그렇다고 다세대주택이 주종을 이루는 국내 주택가를 연상한다면 오산이다. 이들 지구는 보행로와 차로가 널찍하다. 사람과 차가 아슬아슬하게 교차하는 우리 주택가의 좁은 골목길과 다른 것이다. 물론 이곳에도 골목은 있지만 여기서 차는 보행 속도로 서행해야 하고 짐을 싣거나 내리는 목적이 아니면 주정차가 금지돼 있다(주차는 지구별 공동 주차장 건물에서만 가능하다). 이곳의 골목은 차가 아닌 보행자 공간인 셈이다.

두 지구에서 무엇보다 인상적인 것은 외관이 각양각색인 공동주택 건물들이 서로 벽을 잇대며 블록을 이루고 있다는 점과, 대개 'ㄷ'자 혹은 'ㅁ'자 형태를 띠고 있는 블록의 안쪽 터는 놀이터, 정원 등 거주자 공유 공간으로 꾸며져 있다는 점이다. 이 두 가지 특징은 건축물의 몰개성과 이웃 간의 단절을 문제로 안고 있는 우리 도시의 현실과 정확히 대비되면서 건설공동체 중심의 지역 개발이 지닌 장점을 잘 보여준다.

먼저 외벽의 색과 재질, 창문 및 발코니 디자인, 지붕 형태 등이 제각기 다른 건물들이 공존하면서 도시에 생동감을 준다. 이는 소규모 가구 단위로 주택 설계가 이뤄졌기에 가능한 일이다. 시 당국도 이들 지구에서 건축선(건물의 외곽 경계선)과 건물 높이 정도만 규제, 건축 형식의 다양성을 유도했다.

프란쬐지쉐스 지구에 있는 공동주택 블록. 저마다의 색상과 디자인을 가진 주택의 개성이 드러나 지역 전체에 생동감을 준다. 

신도시인데도 멀게는 1938년에 지어진 오래된 건물이 곳곳에 남아 주택지, 상가, 기숙사 등으로 활용되고 있는 점도 도시 풍경을 다채롭게 한다. 튀빙겐 남부 재개발 지역은 원래 2차대전 승전국 프랑스가 패전국 독일에 주둔시켰던 군대의 병영지였다. 1990년 프랑스군 철수로 병영 부지를 돌려받은 튀빙겐 시는 본격적인 재개발을 착수하기 앞서 군인 숙소, 장교 카지노 등 쓸 만한 건물을 학교 기숙사, 상업 시설로 분양했고, 그 덕분에 지역사가 살아있는 신도시를 만들 수 있었다.

구성원들이 더 나은 주거지 건설을 놓고 의견을 나누며 유대감을 키우는 장이었던 건설공동체는 주택 블록 내부의 공유지를 만드는 과제를 놓고 블록 내 다른 공동체들과 협의에 나서게 된다. 블록마다 녹지나 놀이터를 조성하는 것은 시가 부과한 의무지만 이들 공동체는 공통 과제를 함께 풀면서 이웃 간 교류를 넓히고 공동체의식을 확대한다.

튀빙겐 시는 프랑스 군이 주둔했던 병영 부지에서 쓸 만한 건물들을 재활용 했다. 보강 공사를 거친 막사엔 목공소가 들어섰다.

튀빙겐 지역 건축가 마티아스 귀초프씨는 6개 건설공동체가 조성한 프란쬐지쉐스 지구 내 주택 블록을 사례로 이런 과정을 설명한다. "이곳에 거주하는 70가구 중 15가구가 각 공동체를 대표해 공유지 조성 문제를 협의했다. 대표들은 회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자기 공동체에 전달할 의무가 있다. 협의 결과 이 블록에선 각 공동체들이 자신들의 건물 면적을 줄여 공유지를 넓히고 이곳에 어린이 놀이터를 꾸몄다. 독일에서 통용되는 '공공 사용권이 개별 재산권을 앞선다'는 원칙을 주민들 스스로 실현한 것이다."

'살 사람이 집을 짓는다'는 이 지역의 재개발 원칙은 주거는 언제든 처분할 수 있는 재산이 아니라 장기적이고 지속적인 삶의 터전이라는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튀빙겐대 학생 시절부터 15년째 프란쬐지쉐스 지구에 살고 있다는 파비안 베츠 씨는 "집 밖에 나가면 항상 아는 사람을 만난다"며 "이웃들과 한 달에 한 번씩은 지역 자치를 위한 워크숍을 하고, 헌옷을 교환하는 벼룩시장 개설, 가족 소풍, 마을 신문 발행 등의 활동을 수시로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주거 밀도가 너무 높고 주차가 불편하다며 이곳을 떠나는 사람도 있지만, 전반적으론 아이들 키우기 좋고 창조적 분위기가 넘치는 마을 분위기에 만족하는 주민들이 대다수"라고 전했다.

베츠 씨는 한 건설공동체가 지은 집을 빌려서 살고 있는데 집세는 시장가격보다 25% 정도 싸다. 튀빙겐 시는 건설공동체 구성원이 자기 집을 셋집으로 내놓을 경우 10년 동안 시장가격 이하로 집세를 받도록 규제하고 있다. 집을 팔 때도 시가 시장가격보다 낮은 가격으로 우선 매입하게끔 돼 있었지만 워낙 수요자가 많아 최근 판매자가 이익을 붙여 다른 사람에게 직접 파는 것을 허용했다. 하지만 그 이익 범위는 30%를 넘지 못하게 했다. 사유재산권 제한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이런 정책이 주민들의 반발 없이 시행되고 있다는 점은 한국 부동산 시장의 왜곡된 현실에서 깊이 새겨볼 대목이다.

여러 채의 공동주택으로 이뤄진 블록 내부 공간엔 이웃한 건설공동체들이 함께 협의해서 만든 어린이 놀이터, 정원 등이 있다. 

전통적 대학 도시이자 세계적으로 가장 살기 좋은 도시 중 하나라는 튀빙겐의 명성은 20년 전만 해도 네카어 강 이북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슈투트가르트(바덴뷔르템베르크 주의 수도)에 있는 도시설계사무소 ISA 대표로 튀빙겐 재개발 사례를 연구해온 이석정 한양대 교수는 "튀빙겐 남부는 대단위의 프랑스군 병영, 사격 훈련장과 전차 창고, 발전 시설, 공동묘지, 잡다한 상업시설들이 혼재해 튀빙겐 북부에 비해 낙후한 지역으로 여겨졌던 곳"이라며 "하지만 건설공동체라는 새로운 도시 개발 기법을 창안, 거주와 상업 시설이 공존하고 보행로와 녹지가 자연스럽게 살아있어 세계적 각광을 받는 도시로 거듭났다"고 말했다.

"한 프로젝트에 20~30번 회의… 3년 정도 소요"


[인터뷰] 마티아스 귀초프 건축사무소 W5 대표

건축사무소 주도로 공동체 모집… 구성원들 이견땐 건축가가 조율


마티아스 귀초프 건축사무소 W5 대표

튀빙겐 시가 건설공동체 제도의 기틀을 잡은 뒤 본격화된 재개발 사업에서는 이 지역 중소 건설업체의 역할이 컸다. 지역에서 오래 활동해온 건설업체들은 그들의 인맥을 활용해 건설공동체를 조직했고, 주민들의 다양한 요구를 조율하며 개성 있는 공동주택을 설계했다. 프란쬐지쉐스 지구에 있는 건축사무소 W5의 공동 대표인 마티아스 귀초프(사진)씨 역시 그런 인물 중 한 명이다. 그는 10년 전 두 명의 동료와 함께 차린 건축사무소를 튀빙겐 재개발을 통해 직원 13명의 중견 업체로 키웠다.

_건설공동체 조직부터 공동주택 완공까지 과정이 궁금하다.

"요즘은 건축사무소가 주도적으로 건설공동체를 구성하고, 건설공동체는 시로부터 건물을 지을 토지를 산다. 이어 건축가가 설계를 시작하는데 이 시점에서 공동체 구성원들은 각자 은행 보증을 받아 자금 조달 계획을 시와 건축사무소에 제출해야 한다. 건축가가 설계를 통해 정확한 비용을 산출하고 이에 맞춰 구성원들이 첫 비용을 지불하는 단계에서 대개 프로젝트의 성패가 갈린다. 그 과정까지가 보통 1년 반 걸리고, 착공부터 준공까지 다시 2년 반이 걸린다. 하자 보수까지 더해 하나의 프로젝트에 대략 3년에서 3년 반이 소요된다."

_건설공동체 구성원들의 다양한 요구를 조율하기 쉽지 않겠다.

"내가 맡았던 프로젝트 중 가장 큰 건설공동체는 35가구였고, 보통은 10~20가구다. 완공할 때까지 이들과 20~30번의 회의를 하는데, 가장 먼저 싸움이 일어나는 것은 창문 색깔을 결정할 때다. 창문은 건축가에겐 건물 외양에 중요한 요소이고, 구성원 각자에겐 집안 분위기에 큰 영향을 미치는 요소다. 결국 건축가가 모든 가능한 대안을 보여준 뒤에야 52 대 48 정도의 비율로 최종안이 결정된다. 조정하기가 난감한 일들의 연속이지만 그런 과정을 거치며 구성원들은 누군가와 함께 산다는 것이 뭔지를 알게 된다. 갈등을 해결하는 과정을 배우는 소중한 학습 과정인 셈이다."

_주로 어떤 계층이 입주하려 하나. 시는 다양한 계층의 공존을 바라는데.

"이 지역은 어떤 계층이 주도권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없을 만큼 주민 성향이 다양하다. 튀빙겐이 대학 도시라 프로젝트 초기만 해도 대학 졸업생이나 아기가 있는 부부가 많았다. 고등 교육을 받은 젊은 세대의 비율이 높았던 셈이다. 하지만 건축비가 시중보다 저렴하다 보니 점차 온갖 계층의 사람들이 이주했다. 예컨대 가장은 공장 노동자이고 부인은 청소부로 일하는 아프리카 출신 가족도 건설공동체에 참여해 집을 지었다. 이들은 독일에서 20년을 살았으면서도 독일어를 잘 못한다. 자칫 반갑지 않은 주민이 될 수도 있었지만 이웃의 신뢰를 얻어 잘 살고 있다."

"건설공동체 주택 건설회사 것보다 15% 저렴하다"


[인터뷰] 코르트 쉘케 튀빙겐시 건설 부시장

50가구와 첫 시범사업 3년 걸려… 그 경험 통해 제도 만들며 자신감


코르트 쉘케 튀빙겐시 건설 부시장

낙후됐던 튀빙겐 남부를 성공적으로 재개발한 비결인 건설공동체는 튀빙겐 시 공무원들이 창안한 것이다. 코르트 쉘케(사진) 튀빙겐 시 건설 담당 부시장도 그 일원이다. 지난 14일 튀빙겐 시청에서 만난 그는 "나를 비롯한 담당 공무원들이 정치적 영향에 휘둘리지 않고 시종 재개발 프로젝트를 맡아온 덕분에 건설공동체라는 새로운 개발 방식을 일관되게 시행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_당시로서는 전례가 없던 건설공동체를 구상한 계기는.

"크게 네 가지다. 먼저 가격이다. 건설공동체가 지은 주택은 건설회사의 것보다 15%가 싸서 저렴한 주거를 시민에게 제공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재개발 지역의 규모가 공공이 전담하기엔 너무 컸다는 점이다. 직업, 인종 등에서 다양한 계층을 도시에 품고자 했던 것이 세 번째 이유다. 마지막은 우리가 처음엔 미처 생각하지 못한 효과인데, 건설공동체가 자기 필요에 따라 상점 등 다양한 용도의 시설을 끌어들였다는 점이다. 만약 건설회사가 대단위를 개발하는 방식이었다면 비주거 시설이 지금처럼 다양하게 들어올 수 騙珦?것이다."

_추진 과정에 어려움은 없었나.

"굉장히 어려웠다. 건설공동체라는 아이디어는 냈지만 법적으론 어떻게 적용할까, 융자는 어떻게 하나, 공동체마다 개별적으로 짓는 건물들을 어떻게 조정할 것인가 등등. 주어진 답이 없는 상황에서 건설공동체 3곳(50가구)과 처음 시범사업을 했다. 3년 가까이 걸렸지만 그 경험을 통해 제도와 규칙을 만들며 자신감을 얻었다. 이후 건설회사보다 건설공동체에 토지 구매 우선권을 주면서 사업을 진행했다. 건설공동체에 대출을 꺼리던 은행들이 이젠 건설사보다 낮은 이자로 돈을 빌려준다. 구성원이 여럿이라 대출해주기에 안전하다는 사실을 안 것이다."

_프랑스군 병영 건물을 재활용하는 것이 역사적으로 부담이 되진 않나.

"그곳에 외국 주둔군이 있었다는 것도 엄연한 튀빙겐의 역사다. 그리고 그곳에 대한 시민들의 기억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프랑스군은 1년에 한 번 병영을 개방해 페스티벌을 열었고 병영 주변엔 프랑스 음식점도 있었다. 현실적인 이유도 있다. 우리는 기존 군대 건물에 학생 기숙사나 상업 시설을 들였는데, 점차적으로 재개발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그렇게 도시의 활력을 유지해갈 필요가 있었다. 현재 재개발은 70% 가량 진행됐다. 남은 30%는 연방 정부가 재개발 지역을 관통하는 도심 고속도로를 우회로로 변경하는 공사를 해줘야 진행할 수 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10/10/27 21:05:14  수정시간 : 2010/10/28 11:32:0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