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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詩詩한 디자인


별 헤는 밤에 시집을 펴고 디자인을 읽어본다. 종이와 여백, 서체와 행간, 자간과 장평을 고루 헤아려 보면서 한 구절의 시가 간직한 디자인을 불러봤다.




별 헤는 밤에 시집을 펴고 디자인을 읽어본다. 종이와 여백, 서체와 행간, 자간과 장평을 고루 헤아려 보면서 한 구절의 시가 간직한 디자인을 불러본다. 


에디터 이안나 | 사진 스튜디오 salt | 디자인 나은민

 

 

『불맛』실천문학사

안상수가 만든 실천문학사의 시집을 두고 어느 신문사의 기자는 이렇게 말했다. “옛 활자본을 떠올리게 하는 본문 글자체가 일급 디자이너인 그의 역량을 여실히 보여준다.” 요란하고 빠르게 흘러가는 현대사회에서 실천문학사의 시가 가진 민중서정시의 고유성을 잃지 않는 담백한 시집, 안상수가 만든 실천시선이 그렇다. 시작은 표지다. 시인이 살았던 고향을 질료 삼아 만들어낸 표지는 빛깔로 가득하다. 흙의 빛이라 해서 꼭 황토빛만 있는 것은 아니다. 시집은 동백빛 노을(실천시선181번 『삐비꽃이 아주 피기전에』)을 담기도 하고, 이끼 낀 바위(개정판 『접시꽃 당신』)를, 대나무 빛깔(실천시선184번 『살구꽃 그림자』)을 담아내어 표지에 시각화했다. 표지를 한 장 넘기면 면지가 보인다. 표지와 목차 사이에 있는 종이로 일반적으로는 백색이지만, 안상수는 여기에 시인의 고향에서 채집한 이미지를 옮겨놓았다. 표지의 빛깔과 연관되는 갈대, 들풀, 대나무 등이다. 본문 시는 폰트의 크기 차이로 일정한 긴장을 만들어내면서도 단정하게 읽히도록 편집되었다. 실천문학사 이선화 디자이너는 시선집이 “눈에 보이는 게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말해주는 담백한 디자인이다”라고 말한다. 시집을 본 시인이 “시심을 정확하게 포착한 디자인”이라고 감탄할 만하다.

 

『찬란』문학과지성사

문학과지성 시인선(이하 ‘문지’)의 편집디자인은 표본이다. 역사가 깊은 출판사들은 저마다 편집 원칙이 있고 문지는 지금 기준의 자리에 서 있다. 시는 들여쓰기를 제목과 본문에 똑같이 사용하고 멋대로 어절을 행갈이하지 않으며, 시인이 비워둔 행은 맨 윗줄이라도 그대로 비운다. 책의 핵심은 텍스트다. 문지는 이런 작은 부분까지도 필자의 의도를 해치지 않으려고 노력한다. 텍스트를 해치지 않는 디자인, 텍스트가 읽히는 것을 돕는 디자인이 편집디자인의 기본이라는 것이 문지의 생각이다. 비단, 그들만의 것이겠는가. 문학과지성사의 미술팀 정은경 디자이너는 “출판사가 정한 편집디자인이란 없을지도 모른다. 다만 문지에는 한 권의 책을 위하는 편집디자인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텍스트에 초점을 맞추어, 독자가 시를 읽는 속도에 맞게 글자의 크기와 행간의 너비를 움직인다. 밀도 있게 읽혀야 할 원고는 글자 크기나 행간에 적절한 긴장과 속도감을 주고, 반대의 경우엔 여백과 행간, 쪽번호 등에서 유연함과 넉넉함을 준다.


문지는 지금까지 총 375권이 출간되었다. 크게 나눠 1~99번, 100번대, 200번대, 300번대로 구분된다. 시인선 1번은 황동규 시인의 『나는 바퀴를 보면 굴리고 싶어진다』인데, 초판이 1978년 출간되었으니 활판인쇄 시절이다. 그러던 것이 200번대부터 본문이 사진식자를 거쳐 컴퓨터 조판으로 만들어진다. 이때가 맥킨토시 편집이 자리를 잡은 시기로, 문지는 인쇄술 변화를 고스란히 겪어왔다. 디자인은 이미 1970년대에도 파격이었고 지금도 나름의 파격이 있다. 앞표지 전면에 두꺼운 사각틀을 두르고 눈에 띄는 갈색을 바른 파격이, 그것도 시리즈에 적용된 예는 한국의 북디자인사에서 흔치 않다. 문지의 파격은 ‘파격을 위한 파격’, ‘단발성 파격’이 아니다. ‘텍스트를 과도하게 넘어서지 않는 지속적이고 의미있는 파격’ 이다.




『해』,고요아침

시단의 원로 격인 성찬경 시인이 아홉 번째로 펴낸 시집의 제목은 ‘해’이다. 하지만 제목 밑에 적힌 구절에 먼저 주목해볼 필요가 있다. ‘일자시집’ 즉, 시 제목이 모두 한 글자란 소리다. 시인이 구사하는 기법은 ‘밀핵 시’이다. 밀핵 시란, 단어가 가진 밀도를 극도로 높여서 쓰는 것으로 한 개의 글자로만 된 제목과 몇 줄의 본문 그리고 친절한 각주가 모여 하나의 시를 완성한다. 시 본문이 아예 없는 것도 더러 있다. 이에 따라 고요아침의 김남규 디자이너가 핵심적으로 꼽은 디자인 요소는 여백이다. 최대한 여백을 살려 상상의 공간을 확보하는 데 중점을 둔 것이다. 시를 아래 여백에 가까이 두고 위 여백은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이를 구현했는데, 단어를 돋보이게 하려는 의도가 담겨서인지 시집을 읽다 보면 페이지 넘김이 빨라지면서 속도가 붙는다. 전위적인 시로 말미암아서 한쪽으로 치우친 본문의 위치는 일반적인 편집디자인의 틀에서 한참 벗어나 있다. 고요아침에서 펴낸 < 열린시학 시인선> , < 열린시학 정형시집> , < 열린시학 기획시선> 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파격적인 형태로 작가의 의도가 아니었다면 접할 수 없었을 디자인이다. 판형 또한 여백을 최대한으로 두기 위해 기본형보다 약 1.5배 커졌다. 내지의 왼쪽 면에 시 제목을, 오른쪽 면에 시 본문을 앉힌 시집은 모습 그대로 간결미와 압축미가 있다. 이렇게 시인의 작품 세계를 과감히 펼쳐보이되 자간, 장평, 행간, 폰트 크기는 출판사 고유의 형식을 따랐다.

 

『시 삼백』자음과모음

중국 최고의 시집으로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전해지나 실은 작자 미상인 『시경』. ‘시 삼백’은 300편의 시로 이루어져 있다 하여 붙여진 『시경』의 또 다른 이름이다. 짐작했겠지만 김지하 시인이 최근 몇 년의 시작(詩作) 중 305편을 모은 시집 『시 삼백』은 시경에 대한 일종의 오마주다. 그렇게 해서 모두 305편이 정리되었고, 이들 중 이백여 편은 교훈적인 것, 이야기, 풍자, 노래, 초월까지 다섯 가지 양식으로 갈라졌다. 그리고 무엇으로 갈래 짓기 힘든 나머지 백여 편은 다시 ‘땡’, ‘똥’, ‘뚱’으로 이름 붙여 재구성되었다. ‘땡’은 시인의 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의 별명으로 ‘중생시’의 양식이고, ‘똥’은 조금 구린내 나는 상상력의 영역을, 그리고 ‘뚱’은 세상이 마음에 안 들거나 사는 데에 영 재미가 없는 차원을 지적하고 있다.


시인의 부탁으로 디자인을 맡은 사람은 다시금 안상수다. 그는 시인의 무기(巫氣)를 표현하는데 주목했고, 고희에 가까운 시인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형광별색이라는 전위적인 디자인으로 표현했다. 시집 역사상 전례가 없이 3권의 시집에 주황색, 노란색, 연두색이 쓰인 배경이다. 자음과모음이 안상수에게 전권을 맡겨 나온 시집

『시 삼백』은 시인의 결을 잘 살린 디자인으로 현실에 속해 있으면서 동시에 예술성을 잃지 않은 김지하의 기개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묻고 응답하고 침묵하고 화내고 슬퍼하고 초월하고 웃고 놀리고 숨어들고 뛰쳐나가는 시와 어울리는, 속이 화해지는 디자인이다.

 

『정현종 시선』,시와시학사

사진 속 『정현종 시선』은 보급판이지만, 100부만 따로 작업해서 찍어낸 수제본은 국내에 나온 시집 가운데 최고가이다. 『정현종 시선』은 시인의 자필로 쓰여진 시를 모아서 출간된 시집으로 전통 제본방식으로 만들어졌다. 결이 고우면서도 탄력이 좋은 풍산 한지에 자필 원고를 실크 방식으로 인쇄했으며, 밀랍을 입힌 무명실로 꿰매 만들었다. 시집을 넣는 책갑은 여러 장의 종이를 붙여 천을 댔는데, 전 공정(工程)이 수작업이다. 제작을 맡은 사람은 문화재 복원수리 기능공인 김권영 씨로

책 가공의 세세한 부분까지 출판사가 신경 썼음을 알 수 있다. 시와시학사 정미란 편집장은 “시인의 숨결은 자필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정현종 시인이 서문을 비롯해 대표작 30여 편을 직접 붓으로 써 시인의 존재감을 보다 가까이에서 느낄 수 있도록 제작했다. 시인의 시적 정수를 맛볼 수 있는 책이라고 감히 말할 수 있겠다”고 전한다. 한국식 전통 제본방식인 오침 제본으로 시는 앞장과 뒷장이 붙어 있다. 시를 넘기면서 느껴지는 종이의 묵직함이 손끝에 닿으면서 시집의 품격까지 전해진다.

나이가 들면 통상적으로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어지기 마련인데, 시인은 출판사에 직접 찾아와 교정을 보았다고 한다. 그 날이면 조금은 긴장한 분위기 속에서 디자인을 손봤을 편집실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시집을 만든 디자이너는 “시인이 편집실을 찾을 때마다 시를 짓는 창작의 노고가 고스란히 느껴졌다”고 기억한다. 각별한 시집을 만들기 위해 노 시인과 출판사 편집자 그리고 디자이너가 얼마나 고민을 했을지 떠올려보니 더욱 귀하게 여겨진다.

 

『설운 서른』, 버티고

설운(서러운) 서른이라니 재미있는 제목이다. ‘설운’과 ‘서른’의 음률적인 중첩은 김삿갓이 쓴 시에서 비롯되었다. 책을 펼치면 ‘불안한 나이’ 서른에 대한 기형도, 장석주, 황지우 등 50명 시인들의 시가 한 권에 엮여있다. 신기한 것은 세로읽기다. 시는 모두 세로쓰기를 사용했는데 불편한 것보다는 일독의 시간이 조금 길어진다. 버티고의 구수연 디자이너는 세로쓰기의 시집을 만들기 위해 처음에는 가로쓰기용 서체로 디자인을 했다. 걱정했던 대로 중심이 잡히지 않고 괄호 등 문장부호가 제자리를 못 찾았다. 다행히 세로쓰기용 서체인 활자공간 ‘꽃길체’를 찾아서 시집을 만들 수 있었다. 개발은 되었지만 판매용 코드화가 진행되지 않아 꽃길체를 쓰지 못할 수도 있었지만, 출판사와 활자공간의 배려로 지금의 시집이 나오게 됐다고. 한글은 세로쓰기를 할 때 아름다움이 잘 드러나며 글을 천천히 음미하는데 도움이 된다. 시인들이 한 땀, 한 땀 정성 들여 써내려간 시어와 문장들, 그 사유의 숲길을 음미하며 산책하기 위해서는 조금은 느리게 읽을 줄도 알아야 한다. ‘빨리, 빨리’만을 외치는 세상에서 『설운 서른』의 시만큼은 조금 느리게 읽혔으면 하는 바람에서 쓰여진 세로쓰기. 표지는 일러스트레이터 김시훈의 작업으로 책 한 권을 만드는데 들인 디자이너들의 공이 책 이곳 저곳에 묻어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