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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디자인 읽기의 확성기 쓴 소리 1 : 쓴소리

‘시크’하고 ‘쿨’한 사람이 인기를 끈다는 말이 나돕니다만, 애석하게도 저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인지라 유행에 맞춰 호감 가게 말하기는 애당초 글러먹은 것 같습니다. ‘무심한듯 시크하다’는 말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죠. 유행어는 시류를 반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충 모른 척 할 줄 알아야 멋쟁이로 쳐줍니다. 반면 깊이 파고들며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촌스럽다고 여기곤 하죠.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다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제 눈을 반긴 것은 ‘대전시 교육감 선거 포스터’였습니다. 고층 건물 벽면을 반 정도 뒤덮은 울트라 메가 사이즈 포스터들은 압도적인 그래픽이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의 시각 문화로부터 잠시 자유로웠던 저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신선한 관찰거리였죠. 하지만 직업적 공상은 이내 물러가고 ‘대전시 교육감으로 적당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실질적인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그건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사람들은 교육감 후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왜 어마어마한 포스터들이 나붙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 특히 학부모들에게 대전시 교육감 선거는 인기투표와 다를 바 없는 행사입니다. 교육 관계자에게 이름 한번 들어봤거나, 조금이라도 낯익은 사람을 찍는 거죠. 후보들의 경력과 공약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 취급 받습니다. 경력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고 공약은 휴지조각일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더구나 아무도 교육감이 바뀌어서 어떤 개선이 이뤄지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 건 시니컬한 농담뿐입니다. 이런 얘기가 디자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범위를 좁혀서 말해 보죠. 요즘 한국 디자이너는 시크할 대로 시크합니다. 자신이 매일같이 하는 일에 적당히 무심한 채로 오직 생계만을 위해 일하며 주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만 살핍니다.

 


디자인 사회가 우러러보는 롤 모델은 어떤 모습입니까. 외국에서 유학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작지만 진보적인 갤러리에서 알쏭달쏭한 전시회를 해야 한국 그래픽디자인 사회에서 잘 나가는 축에 낍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유학 - 교수 - 전시회로 이어지는 경력을 이상적인 커리어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 디자이너와 학생의 주요 관심이 언제나 디자인의 외적인 사항에만 쏠린다는데 있습니다.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디자인 잘한다니까 자신도 유학을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교수님들의 전시회를 보며 왠지 이상적인 디자인은 별천지에 있는 것이 아닌지 하며 뜬구름 잡습니다. 그러다 보면 디자인에 몰입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전시회하고 유명해졌는데 나는 왜 여기서 전단지나 만들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유명하고 인기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바람, 그리고 그 바람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며 있지도 않은 한계를 느끼고 다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디자인에 대해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생각합니다. 책 열심히 읽어봐야 나랑 아무 상관없는 딴 나라 얘기죠. 없는 시간 쪼개서 강연회나 워크숍에 나가보면 재미는 있지만 실무에선 먹히지 않는 실험적인 논의뿐입니다. 디자인 블로그에는 온통 현학적인 내용만 올라오죠. 동인지는 고상하고 배부른 소리를 내뱉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다른 사람들 몫이고, 남겨진 건 수당 없는 밤샘 작업뿐입니다. 디자인을 열정적으로 대할 만한 동기가 없어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들 중 단지 99 퍼센트만이 그럴 뿐입니다.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은 수단이 아닌 목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클라이언트의 소득증대를 위해’ 디자인을 한다고 생각했다면 번지수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다른 일을 찾으세요. 디자인 계속 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디자인을 목적으로 여긴다면, 즉 ‘좋은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면 일단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셈입니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신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 될 겁니다. ‘무엇이 좋은 디자인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당신에게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아니, 각자가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네요.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요? 누가 속 시원히 알려주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가치가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쪽의 가치관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눈에 띄죠. 디자인도 마찬가집니다. 100년, 50년 전에 미국과 유럽을 주름잡던 디자이너들의 사상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남들은 좋아 죽는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작품이 나에게는 쓰레기일 수도 있고, 모두가 열광하는 네덜란드 디자인에 시큰둥할 수도 있어요. 트렌드는 남들이 하는 얘기일 뿐입니다. 그게 나의 길일 수는 없습니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디자인은 무조건 좋은 디자인이고 그것을 따르면 내 디자인도 좋아질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대세’라는 말이 있죠. 우리는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대세를 따르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내심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까 동조해야만 할 것 같죠. 주관이 없는 겁니다. 내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말에 쉽게 휩쓸립니다. 감히 단언컨데, 디자이너는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고 유행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말은 몽땅 헛소립니다. 그런 사기꾼의 말에 미련을 두지 마세요. 나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유행은 독약입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배는 태풍이 오면 여기저기 휩쓸리다가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웬만한 파도에 쓸려가지 않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씨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성인이 되었으면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사회에 뭔가를 환원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선단체에 성금을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환원은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 하고, 군인은 나라를 잘 지키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제대로 한다면 이 사회가 잘 돌아가겠죠. 배운 사람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선행도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합니까?  아니,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나 있습니까?

무엇이 좋은 디자인일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이고, 나침반 없는 사막의 여행자입니다.

 


요즘에는 많은 디자이너가 기업에 연관된 활동을 위주로 살아갑니다. 쉽게 말해 기업의 지갑을 배불려주는 일을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기업도 디자인을 수익 증대 수단, 딱 그 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기업이 그토록 애절하게 외치는 고객만족, 사용자의 편의 따위는 모두 제품과 서비스를 팔기 위한 수단입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현실입니다. 디자이너가 기업의 상업적 가치를 ‘전지전능하신 클라이언트 님의 고귀하신 뜻’으로 모시는 상황에서 디자인은 돈을 벌어다주는 도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업가가 디자인을 효율적인 선전 수단으로 인식한 때는 1900년대 중반 미국의 기업들이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당시 현대주의 예술을 비즈니스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미국의 사업가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가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예술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보고 ‘소비의 공학’, ‘의도적 노후화’, ‘스타일로 치장한 제품’과 같은 마케팅 수단을 주창했습니다.

 


“광고에 사용되는 이미지와 디자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 이미지와 디자인은 내부를 보여주는 단면도여서는 곤란하다. 광고는 커피에 얹은 거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예술을 약게 활용한다면 추하고 멍청하고 진부한 내부를 능히 감출 수 있다.”

-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 미국의 광고예술, <Looking Closer 3>, <Studio Yearbook>에 최초 기재(The Studio, 1936년, 런던)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의 방법론은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75년 전 미국의 사업가가 했던 말이 지금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디자이너는 예술과 디자인을 본질로부터 분리한 채 단지 새로운 스타일로 치장하는데 사용해서 사람들이 불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게끔 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저는 요즘 온갖 미디어에서 외쳐대는 ‘트렌드’란 말을 들을 때마다 역겨움을 느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트렌드, 유행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스러운 형성 과정을 잃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트렌드란 것은 기업이 어떻게든지 물건과 서비스를 팔아먹기 위해 대규모 자본과 물량 공세를 펼쳐 조작해 낸 흐름입니다. 이렇게 날조된 이미지를 마치 우상인 양 받들고 이를 따라잡네,  앞서가네 하며 애쓰는 모습은 웃기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기업의 활동에는 장사의 원칙만 있을 뿐 디자인의 철학은 없습니다. 기업에 고용된 디자이너는 유행을 순환시키는 데 필요한 이미지를 찍어 내면서 그것이 사실은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사용자를 위한 것이라고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죠. 도대체 우리가 만드는 말끔한 제품 로고와 현란한 TV 광고, 포장지, 웹사이트의 어떤 부분이 사용자를 위한 것입니까. 아, 그렇군요. 웹사이트의 결제 메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들어서 소비자의 지갑을 재빨리 열게 할 수는 있겠네요.

 


“디자인은 자본이 주도하는 문화 산업의 일방적인 놀음에 좌지우지되며 현실을 왜곡하는 한낱 거짓된 활동으로 타락했다. (중략) 우리는 눈먼 자유 속에서 그저 돈을 버는 일에 만족하며 반성과 비평의 신경을 절단한 채 자신을 스스로 속물화 시켰다.”

- 얀 반 툰, <디자인 그리고 깨어 있는 의식>, <그래픽 디자인 이론: 그 사상의 흐름>(비즈앤비즈, 2009)

 


자본주의 논리에 찌든 기업 활동에 염증을 느낀 디자이너에게 ‘공공디자인’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떠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하지만 사실 ‘공공디자인’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디자인은 그 활용과 기능에 있어서 이미 공공의 성격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요즘 얘기하는 공공 디자인은 사실 ‘관공서에서 실시하는 디자인’이라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그래픽디자인은 매체의 표현에 관여하며 사회의 모습을 이룹니다. 가로수와 표지판이 도로의 경관을 형성하듯이 잡지와 책은 독자의 마음에 비치는 경치를 이룹니다. 공원의 벤치와 나무 그늘에서 행인이 휴식을 취하듯이 잘 만들어진 휴대폰 화면과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은 각박한 생활의 즐거움이 됩니다. 디자이너는 생활 속의 수많은 작은 일을 통해 공익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대규모 환경 미화 사업이 공공디자인으로 분류되는 상황은 디자이너가 일상 속에서 대중 매체를 디자인 함에 있어 공익의 가치를 전혀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한동안 너도나도 정부에서 이슈화시키는 공공디자인을 입에 담으며 내심 그것이 나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줄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까요? 오랜 세월동안 자생적으로 형성된 거리, 시장, 운동장을 몽땅 갈아엎고 그 위에 기하학적 모양의 벤치를 세우고, ‘디자인 센터’란 걸 세우고, 재개발에 재개발을 거듭하는데서 어떤 ‘공익’이 발생한다는 겁니까. 요즘 정부에서는 ‘한국적’이란 말을 신앙처럼 받들고 전파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몇 십년간 간신히 자리 잡은 한국적인 모습을 몽땅 밀어버리고 거기에 외국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세련된’것으로 채워 넣으려는 망상이 전부입니다.

 


정부에서 주도하는 디자인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첫째는 모든 걸 거인의 시선으로 바라보게 된다는 점입니다. 거인의 시선은 달리 말해 ‘투시도의 시선’, ‘조감도의 시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1900년대 초, 미래주의 건축가들은 투시도를 통해 가상의 유토피아를 그렸습니다. 그 유토피아에는 끝없는 에스컬레이터가 있고, 거대한 굴뚝이 있고, 반듯반듯한 차도와 벽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모습이 궁금하시다면 이탈리아의 안토니오 샌트 엘리아라는 건축가의 이름을 검색해 보시거나 수도권 신도시의 초고층 주상복합 건물을 찾아가 보세요. 그 설계도들은 실로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곳에는 사람이 없어요. 굳이 상상하자면 거대한 투시도 속에서 사람은 눈썹털보다 작은 크기일 겁니다. 지금 광화문 광장에 대해 말이 많죠. 광화문 광장이나 서울시청 광장 같은 구조물은 헬리콥터를 타고 봤을 때 보기 좋은 공간일 뿐 그 안에 들어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배려한 공간은 아닙니다. 둘째는 계획대로 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점입니다. 도시는 하얗게 칠하고 조명을 설치한 다음 ‘손대지 마시오’ 표지판을 걸어놓는 갤러리가 아닙니다. 우리가 말하는 그곳은 사람들이 살아가는 장소입니다. 닳고, 부서지고 때가 타고, 얼룩지고, 전단지가 나붙고, 가판대가 설치되고, 웃고 떠드는 장소입니다. 자생적인 변화가 아닌 어떤 거대한 기획에 따라 일률적으로 계획된 공간은 인간의 유기적인 삶을 담지 못합니다. 언젠가는 때가 타고 허물어지고 덧붙여질 수밖에 없어요. 그 어떤 계획도 의도대로 흘러가지 않을 것임은 너무도 자명한 일입니다.

 

디자이너는 본질과 동떨어진 일에 얽매인 채 도덕성에 큰 상처를 입고 살아갑니다. 거짓말쟁이 기업의 대변인 역할을 하면서 마음이 편하지 않습니다. 머리와 손이 따로 노는 정부의 지시를 받으며 좌절을 느낍니다. 이 모든 것은 디자이너가 자기 자신의 믿음을 세우지 못한 채 외부의 지시에만 의존해 작업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입니다. 좋은 디자인에 대한 개개인의 가치관 확립이 그 어느 때보다 절실합니다. 디자이너가 따라야 할 절대적인 사상이나 시스템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힘들겠지만 우리는 각자가 추구하는 가치를 찾는 험난한 여정을 거쳐야 합니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무엇이 좋은 디자인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것입니다. 시크하고 쿨한 마음가짐을 버리고 열정적이고 직설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시크’하고 ‘쿨’한 사람이 인기를 끈다는 말이 나돕니다만, 애석하게도 저는 직설적이고 열정적인 사람인지라 유행에 맞춰 호감 가게 말하기는 애당초 글러먹은 것 같습니다. ‘무심한듯 시크하다’는 말에 대해 얘기해 보도록 하죠. 유행어는 시류를 반영합니다. 요즘 사람들은 자신을 둘러싼 사회와 환경, 심지어 자기 자신에게까지 적당히 거리를 두고 대충 모른 척 할 줄 알아야 멋쟁이로 쳐줍니다. 반면 깊이 파고들며 진지하게 물어보는 사람은 촌스럽다고 여기곤 하죠. 한 가지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미국 생활을 하다 오랜만에 한국을 방문한 제 눈을 반긴 것은 ‘대전시 교육감 선거 포스터’였습니다. 고층 건물 벽면을 반 정도 뒤덮은 울트라 메가 사이즈 포스터들은 압도적인 그래픽이 흥미로웠습니다. 한국의 시각 문화로부터 잠시 자유로웠던 저에게 그것은 정말이지 신선한 관찰거리였죠. 하지만 직업적 공상은 이내 물러가고 ‘대전시 교육감으로 적당한 사람은 누구인가’라는 실질적인 의문이 떠올랐습니다. 아버지께 여쭤봤더니 “그건 아무도 모른다”라고 말씀하시더군요. 사람들은 교육감 후보에 대해 전혀 아는 바가 없습니다. 저는 그제서야 왜 어마어마한 포스터들이 나붙어야 했는지 그 이유를 알게 됐습니다. 투표권을 가진 사람들, 특히 학부모들에게 대전시 교육감 선거는 인기투표와 다를 바 없는 행사입니다. 교육 관계자에게 이름 한번 들어봤거나, 조금이라도 낯익은 사람을 찍는 거죠. 후보들의 경력과 공약을 열심히 들여다보는 사람은 모자란 사람 취급 받습니다. 경력은 갖다 붙이기 나름이고 공약은 휴지조각일 것이란 생각이 지배적입니다. 더구나 아무도 교육감이 바뀌어서 어떤 개선이 이뤄지리라 기대하지 않습니다. 결국 남는 건 시니컬한 농담뿐입니다. 이런 얘기가 디자인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요? 범위를 좁혀서 말해 보죠. 요즘 한국 디자이너는 시크할 대로 시크합니다. 자신이 매일같이 하는 일에 적당히 무심한 채로 오직 생계만을 위해 일하며 주변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눈치만 살핍니다.

 


디자인 사회가 우러러보는 롤 모델은 어떤 모습입니까. 외국에서 유학하고, 서울에 있는 대학에서 교수하면서, 작지만 진보적인 갤러리에서 알쏭달쏭한 전시회를 해야 한국 그래픽디자인 사회에서 잘 나가는 축에 낍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저는 그런 활동을 하시는 분들을 비난하는 게 아닙니다. 문제는 유학 - 교수 - 전시회로 이어지는 경력을 이상적인 커리어로 인식하는 분위기에서 디자이너와 학생의 주요 관심이 언제나 디자인의 외적인 사항에만 쏠린다는데 있습니다. 유학 다녀온 사람들이 디자인 잘한다니까 자신도 유학을 가야 하는 건 아닌지 걱정하고, 교수님들의 전시회를 보며 왠지 이상적인 디자인은 별천지에 있는 것이 아닌지 하며 뜬구름 잡습니다. 그러다 보면 디자인에 몰입할 수 없습니다. 누구는 전시회하고 유명해졌는데 나는 왜 여기서 전단지나 만들고 있나 하는 생각이 드는 게 전혀 이상하지 않습니다. 유명하고 인기 있는 디자이너가 되고 싶은 바람, 그리고 그 바람과는 영 다른 방향으로 나가는 자신의 진로에 대해 생각하며 있지도 않은 한계를 느끼고 다 부질없다고 생각합니다. 디자인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디자인에 대해 논하는 것은 공허하다고 생각합니다. 책 열심히 읽어봐야 나랑 아무 상관없는 딴 나라 얘기죠. 없는 시간 쪼개서 강연회나 워크숍에 나가보면 재미는 있지만 실무에선 먹히지 않는 실험적인 논의뿐입니다. 디자인 블로그에는 온통 현학적인 내용만 올라오죠. 동인지는 고상하고 배부른 소리를 내뱉습니다. 내가 바라는 건 다른 사람들 몫이고, 남겨진 건 수당 없는 밤샘 작업뿐입니다. 디자인을 열정적으로 대할 만한 동기가 없어요.

 


물론 모두가 그렇다는 건 아닙니다.

우리들 중 단지 99 퍼센트만이 그럴 뿐입니다.

 


‘좋은 디자인을 하기 위해서’.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은 수단이 아닌 목적입니다. 만약 당신이 ‘돈을 벌기 위해’, ‘대기업에 취직하기 위해’, ‘클라이언트의 소득증대를 위해’ 디자인을 한다고 생각했다면 번지수가 완전히 틀렸습니다. 다른 일을 찾으세요. 디자인 계속 해봐야 시간 낭비일 뿐입니다. 디자인을 목적으로 여긴다면, 즉 ‘좋은 디자인을 하고 싶어서’라고 생각했다면 일단 여행을 떠날 준비가 된 셈입니다.

 


여행을 떠나기로 한 당신은 어디로 향해야 할지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게 될 겁니다. ‘무엇이 좋은 디자인이며 어떻게 하면 그런 디자인을 할 수 있을까?’ 아무도 당신에게 해답을 주지 않습니다. 아니, 각자가 서로 다른 곳으로 달려야 한다고 말하는 편이 더 적절하겠네요. 좋은 디자인이란 어떤 것일까요? 누가 속 시원히 알려주면 좋겠지만, 슬프게도 정답은 없습니다. 각자의 가치가 다르고, 세상을 바라보는 눈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한쪽의 가치관을 다른 이들에게 강요함으로써 생기는 부작용이 우리 사회 곳곳에서 눈에 띄죠. 디자인도 마찬가집니다. 100년, 50년 전에 미국과 유럽을 주름잡던 디자이너들의 사상이 나에게는 적용되지 않습니다. 남들은 좋아 죽는 스테판 사그마이스터의 작품이 나에게는 쓰레기일 수도 있고, 모두가 열광하는 네덜란드 디자인에 시큰둥할 수도 있어요. 트렌드는 남들이 하는 얘기일 뿐입니다. 그게 나의 길일 수는 없습니다. 디자이너와 디자인 학생들이 빠지기 쉬운 함정 중 하나가 바로 유명한 디자인은 무조건 좋은 디자인이고 그것을 따르면 내 디자인도 좋아질 수 있다는 착각입니다. ‘대세’라는 말이 있죠. 우리는 아닌 척 하면서 은근히 대세를 따르려는 버릇이 있습니다.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내심 아니라고 생각은 하지만 남들이 다 그렇다고 하니까 동조해야만 할 것 같죠. 주관이 없는 겁니다. 내가 정말로 뭘 하고 싶은지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할 기회가 없었기 때문에 다른 사람들 말에 쉽게 휩쓸립니다. 감히 단언컨데, 디자이너는 트렌드에 민감해야 하고 유행의 선두에 서야 한다는 말은 몽땅 헛소립니다. 그런 사기꾼의 말에 미련을 두지 마세요. 나 자신을 찾지 못한 상태에서 유행은 독약입니다. 정처 없이 떠도는 배는 태풍이 오면 여기저기 휩쓸리다가 부서지고 맙니다. 그러나 항구에 닻을 내리고 있는 배는 웬만한 파도에 쓸려가지 않습니다.

 


첼리스트 장한나씨가 <무릎팍도사>에 출연해서 이런 얘기를 하더군요. “성인이 되었으면 자신의 능력을 사회에 환원해야 한다.” 이 말을 곰곰이 생각해 봅시다. 사회에 뭔가를 환원한다는 것은 반드시 자선단체에 성금을 전달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사회 구성원으로서 가장 기본적인 환원은 자신의 일을 제대로 수행하는 것입니다. 정치인은 정치를 잘 하고, 군인은 나라를 잘 지키고, 디자이너는 디자인을 제대로 한다면 이 사회가 잘 돌아가겠죠. 배운 사람으로서 역할을 온전히 수행하는 것 외에는 그 어떤 다른 선행도 부수적인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제대로 된 디자인을 하려고 노력합니까?  아니, 좋은 디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 관심이나 있습니까?

무엇이 좋은 디자인일지에 대해 깊이 생각하지 않는 디자이너는 자신이 뭘 하는지 모르는 사람입니다. 낭떠러지를 향해 질주하는 폭주 기관차이고, 나침반 없는 사막의 여행자입니다.

 


요즘에는 많은 디자이너가 기업에 연관된 활동을 위주로 살아갑니다. 쉽게 말해 기업의 지갑을 배불려주는 일을 하는 거죠. 마찬가지로 기업도 디자인을 수익 증대 수단, 딱 그 정도로만 인식합니다. 기업이 그토록 애절하게 외치는 고객만족, 사용자의 편의 따위는 모두 제품과 서비스를 팔기 위한 수단입니다. 부정하고 싶지만 현실입니다. 디자이너가 기업의 상업적 가치를 ‘전지전능하신 클라이언트 님의 고귀하신 뜻’으로 모시는 상황에서 디자인은 돈을 벌어다주는 도구 이상이 될 수 없습니다. 사업가가 디자인을 효율적인 선전 수단으로 인식한 때는 1900년대 중반 미국의 기업들이 유럽의 아방가르드 예술에 주목하기 시작한 시점입니다. 당시 현대주의 예술을 비즈니스에 도입하고자 노력했던 미국의 사업가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가 제품을 더 많이 팔기 위해 예술을 전략적으로 이용해야 한다고 보고 ‘소비의 공학’, ‘의도적 노후화’, ‘스타일로 치장한 제품’과 같은 마케팅 수단을 주창했습니다.

 


“광고에 사용되는 이미지와 디자인을 선택하는 기준은 경우에 따라 다양하다. 이미지와 디자인은 내부를 보여주는 단면도여서는 곤란하다. 광고는 커피에 얹은 거품과 같은 것이어야 한다. 예술을 약게 활용한다면 추하고 멍청하고 진부한 내부를 능히 감출 수 있다.”

-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 미국의 광고예술, <Looking Closer 3>, <Studio Yearbook>에 최초 기재(The Studio, 1936년, 런던)

 


어네스트 엘모 칼킨즈의 방법론은 2010년을 사는 우리에게 전혀 낯설지 않습니다. 아니, 차라리 75년 전 미국의 사업가가 했던 말이 지금 한국에서 그대로 재현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겠네요. 디자이너는 예술과 디자인을 본질로부터 분리한 채 단지 새로운 스타일로 치장하는데 사용해서 사람들이 불필요한 제품과 서비스를 구매하게끔 하는 일을 끊임없이 반복합니다. 저는 요즘 온갖 미디어에서 외쳐대는 ‘트렌드’란 말을 들을 때마다 역겨움을 느낍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트렌드, 유행은 이미 오래전에 자연스러운 형성 과정을 잃었습니다. 요즘 사람들이 말하는 트렌드란 것은 기업이 어떻게든지 물건과 서비스를 팔아먹기 위해 대규모 자본과 물량 공세를 펼쳐 조작해 낸 흐름입니다. 이렇게 날조된 이미지를 마치 우상인 양 받들고 이를 따라잡네,  앞서가네 하며 애쓰는 모습은 웃기다 못해 처량하기까지 합니다. 요즘 기업의 활동에는 장사의 원칙만 있을 뿐 디자인의 철학은 없습니다. 기업에 고용된 디자이너는 유행을 순환시키는 데 필요한 이미지를 찍어 내면서 그것이 사실은 고객을 위한 것이라고, 사용자를 위한 것이라고 위로하며 살아갑니다. ‘눈 가리고 아웅’하는 격이죠. 도대체 우리가 만드는 말끔한 제품 로고와 현란한 TV 광고, 포장지, 웹사이트의 어떤 부분이 사용자를 위한 것입니까. 아, 그렇군요. 웹사이트의 결제 메뉴를 쉽게 찾을 수 있게 만들어서 소비자의 지갑을 재빨리 열게 할 수는 있겠네요.

 


“디자인은 자본이 주도하는 문화 산업의 일방적인 놀음에 좌지우지되며 현실을 왜곡하는 한낱 거짓된 활동으로 타락했다. (중략) 우리는 눈먼 자유 속에서 그저 돈을 버는 일에 만족하며 반성과 비평의 신경을 절단한 채 자신을 스스로 속물화 시켰다.”

- 얀 반 툰, <디자인 그리고 깨어 있는 의식>, <그래픽 디자인 이론: 그 사상의 흐름>(비즈앤비즈, 2009)

 


자본주의 논리에 찌든 기업 활동에 염증을 느낀 디자이너에게 ‘공공디자인’은 큰 유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사로운 이익을 떠나 ‘공공의 이익’을 위해 일할 수 있다니! 이 얼마나 환상적입니까.

하지만 사실 ‘공공디자인’이란 말은 어불성설입니다. 모든 디자인은 그 활용과 기능에 있어서 이미 공공의 성격을 내포하기 때문이죠. 우리가 요즘 얘기하는 공공 디자인은 사실 ‘관공서에서 실시하는 디자인’이라고 하는 편이 맞습니다. 그래픽디자인은 매체의 표현에 관여하며 사회의 모습을 이룹니다. 가로수와 표지판이 도로의 경관을 형성하듯이 잡지와 책은 독자의 마음에 비치는 경치를 이룹니다. 공원의 벤치와 나무 그늘에서 행인이 휴식을 취하듯이 잘 만들어진 휴대폰 화면과 아이폰 어플리케이션은 각박한 생활의 즐거움이 됩니다. 디자이너는 생활 속의 수많은 작은 일을 통해 공익을 실현하는 사람입니다. 정부가 시행하는 대규모 환경 미화 사업이 공공디자인으로 분류되는 상황은 디자이너가 일상 속에서 대중 매체를 디자인 함에 있어 공익의 가치를 전혀 추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역설적으로 반영하는 게 아닐까요.

 

 


우리는 한동안 너도나도 정부에서 이슈화시키는 공공디자인을 입에 담으며 내심 그것이 나의 도덕성을 회복시켜 줄 돌파구가 될 수 있을 거라 기대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마음의 평화를 찾았을까요? 오랜 세월동안 자생적으로 형성된 거리, 시장, 운동장을 몽땅 갈아엎고 그 위에 기하학적 모양의 벤치를 세우고, ‘디자인 센터’란 걸 세우고, 재개발에 재개발을 거듭하는데서 어떤 ‘공익’이 발생한다는 겁니까. 요즘 정부에서는 ‘한국적’이란 말을 신앙처럼 받들고 전파합니다. 하지만 그 실체는 몇 십년간 간신히 자리 잡은 한국적인 모습을 몽땅 밀어버리고 거기에 외국 디자이너를 고용해서 ‘세련된’것으로 채워 넣으려는 망상이 전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