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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

이정해의 경고 : 디자인 판타지 - 첫 번째. 디자이너의 미래는 밝다.


나는 90학번이다. 대학 입시 면접에서 왜 디자인을 전공하려 하느냐는 질문을 받았는데, 나는 아주 순진한 발상으로 ‘아름다운 물건들이 좋았고, 그런 아름다운 물건들이 사람들의 삶을 윤택하게 하는 풍경이 좋았다’고 대답했다. 순진하다는 회고조의 말을 쓰게 되기까지는 그때로부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같은 학년에는 군대를 다녀온 복학생 오빠들이 많았다. 그들은 대개 80년대 중후반 학번들로, 가끔 열띠게 ‘디자인 국부론’이라는 걸 이야기했다. ‘자원이 없는 나라인 한국에서는 디자인 인력을 양성해서 산업을 키우고 나라를 부강하게 해야 한다’는 줄거리로, 80년대 초 정시화 선생님이 여러 언론매체에 기고했던 내용이었다. 나는 그런 이야기에 피가 끓어 디자인을 선택하게 된 젊은이들이 함께 학교에 다닌다는 사실에 조금 놀랐다. 디자인의 목표가 삶이 아니라 국가라니, 내 시야각으로는 들어오지 않았던 단어였다. 나중에야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쓴 ‘미술 수출’에서부터 이런 생각의 뿌리가 자라난 것이어서 이미 그런 생각이 대다수 국민들에게는 당연하고 평범한 진리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오히려 나와 같은 사람은 세상 돌아가는 이치를 잘 모르는 어린 여자아이로 여겨진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90년대 중반이 되자 ‘디자인 경영’이라는 제목을 단 책이 쏟아져 나왔다. 기업 경영 전략으로서 디자인에 투자하고 제품을 차별화함으로써 시장에서 우위를 확보하라는 논리로, 이 역시 카리스마 있는 달변가들이 언론매체 뿐만 아니라 디자인 정책을 결정할 수 있는 권력기관의 핵심을 이루었다. 기업과 디자이너를 연결하는 사업이라든지 한국을 대표하는 스타디자이너를 발굴하고 육성한다든지 하는 사업들이 시작되었고, 대기업은 소위 세계적인 디자이너에게 디자인을 의뢰하는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디자이너가 운영하는 스튜디오들이 생겨나기 시작했고, 시간이 흐르면서 어떤 곳은 중견 기업으로도 성장했다. 80년대에 폭발적으로 늘어난 대학의 수에 비례해서 대학 졸업자들은 넘쳐났고, 이들을 싼값에 수용하면서 몇몇 회사의 규모는 커질 수 있었다. 그 사이 트렌디 드라마들에서는 종종 디자이너가 주인공으로 떠오르곤 했다. 게다가 이런 드라마들은 아시아에서 큰 인기를 끌었고, 디자이너라는 직업과 그런 일을 하는 공간은 한국이 얼마나 근대화가 진행된 나라인지를 보여주는 척도처럼 비치기도 했다. 그래서 그들은 TV 안에서 리조트를 건설하거나 패션 산업을 이끌거나 신제품을 개발했으며, 남자 주인공들은 새로 출시된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녔다. 막상 내가 아는 디자이너들은 드라마를 보고 있을 틈도 없이 일하느라 화면 속 그들에게 위화감을 느낄 새도 없었다.

이십 년을 변화무쌍한 바람에 이리저리 나부끼며, 그럼에도 나는 사실 여전히 순진한 발상에서 크게 자라지 못했다. 왜냐하면 의문이 해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모던한 외관을 가질 수 있게 된 것과는 다른 문제로, 아름다운 물건들을 만들어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는가? 보통 사람들의 삶이 보다 윤택해졌는가? 디자이너들은 자기정체성을 가지게 되었는가? 클라이언트들은 좋은 디자인을 판단할 수 있는 힘을 갖게 되었는가? 그리고 문화적인 성숙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디자이너라는 직업을 가진 사람들은 인간답게 살고 있는가? 창의적인 인적 자원이자 문화 수출의 역군이며 기업의 이윤을 높여 줄 일꾼들인 디자이너의 삶의 조건은 사회적으로 보장되고 있는가? 가장 낮은 자리에 있고 가장 많은 수효를 이루는 20대들이 뿌리 내릴 토양을 튼튼하게 하는 작업은 이루어지고 있는가? 간부나 고용주가 아니라 디자이너로 남기 원하는 40대 디자이너에게, 급속도로 진보하는 기술과 매체의 변화를 수용할 수 있는 재교육의 가능성이 있는가? 노년의 디자이너들이 쌓아 온 지식과 경험, 방법론이 폐기처분되지 않고 새로운 시대와 재결합할 기회는 주어질 수 있는가?

 

말하자면 나는 구조적으로 디자이너들이 안정감을 갖고 일하면서 살아갈 수 있는 체계를 마련하는 일이 가장 먼저 시행해야 할 정책이 아닌가 생각한다. 매체는 디자이너를 무언가 멋지고 창조적이며 많은 돈을 벌면서도 자유로운 직업인 것처럼 묘사해 왔지만, 실제로 대부분 디자이너들의 생활은 피폐하다. 디자이너들의 미래는 불안정하다. 대기업 정규직 노동자로 일하는 이들을 제외한다면 말이다. 잘하는 디자이너만 육성한다, 커리어와 야심이 있는 디자이너만 지원한다, 그렇게 엘리트 위주의 정책은 결과적으로 다른 싹들을 말라죽게 한다. 능력이 아니라 누구에게나 보편타당한 삶의 조건이 기준이 되어야 한다. 직업적으로 평생을 보장할 수 있는 사회적 합의나 연대가 있지 않고서 씨앗에서부터 다시 열매를 맺기까지의 과정을 순환할 수 있을까? 그런 과정을 모조리 개인에게 맡겨버린다면 어떻게 국가가 기능을 하고 있다고 신뢰할 수 있을까?

 

디자인은 생산에 참여하는 모든 주체의 사회적 협의의 결과로 주어지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디자인은 문화이고 생활이다. 디자이너는 각각의 주체들과 의사소통을 하며 요구를 분석하고 의견을 통합하며 창의적으로 문제를 해결한다. 그렇다면 좋은 디자인을 얻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는 자명하지 않은가? 보편적인 디자이너들의 보편적인 능력을 끌어올리는 것. 그를 위한 기반을 마련하는 것. 선택과 집중, 또는 적자생존이라는 말은 너무나 잔인하다. 나는 우리가 좀 더 행복해지기를 바란다. 행복의 힘으로 성장하는 사회가 되기를 바란다.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

 

이정혜의 경고 디자인 판타지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현실에 발을 딛고 선 디자이너가 되어 보자는 의미에서 장밋빛으로 포장되어 있는 디자인의 신화-판타지를 곱씹어본다. 필자는 디자인 방법론과 기획에 관심이 많아서 다방면에 걸쳐 일하기를 즐기는 디자이너. 사진가 김현호와 함께 베가스튜디오를 운영하고 있으며, 2009년에 예쁜 딸을 낳고 나서 깨달은 바가 있어 은밀히 인생 대전환을 꾸미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