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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13> 싱가포르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13> 싱가포르 - 금융 허브 넘어 아트 허브로

탄탄한 도시 인프라 다양한 문화 콘텐츠… 이민자들의 천국
고층 빌딩 숲' 래플스 플레이스엔 세계적 금융기관들 자리 잡아
'르네상스 시티 프로젝트'로 박물관·도서관·공연장 등 건립…
다민족 문화 소비 욕구 충족

싱가포르=글·사진 김경준기자 ultrakj75@hk.co.kr

에스플러네이드에서 마리나 만 너머로 바라본 싱가포르의 금융 중심부 래플스 플레이스. 빽빽하게 솟은 고층 빌딩마다 세계적 금융회사들의 아시아 지역 거점이 들어서 있다. 

폭염의 햇살에 피부는 화끈거리고, 습한 공기에 땀이 비 오듯 쏟아지는 열대성 기후의 여름 한복판. 싱가포르 멀라이언 공원은 카메라 셔터를 눌러대는 관광객들과 산책 나온 시민들로 북적였다. 싱가포르의 상징인 멀리이언상이 물을 내뿜고 있는 이 공원은 마리나 만(灣)과 마주하고 있어 청량감에 목마른 시민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명소다. 주위를 둘러보자 금융 중심지 래플스 플레이스(Raffles Place)의 마천루, 그리고 열대과일 두리안을 형상화한 문화단지 에스플러네이드(Esplanade)의 독특한 외양이 시선에 들어온다. 금융과 예술, 이 도시가 지닌 두 가지 지향점이 동시에 다가왔다.

이민자의 도시

이마에 빈디를 찍은 인도 여성, 차도르를 덮어쓴 말레이 여성, 말끔한 정장 차림의 동아시아 남성, 실크 블라우스에 하이힐을 신은 중국계 여성까지, 래플스 플레이스는 사람들의 활기로 가득 차 있었다. 서울의 여의도와 비슷한 인상이지만 고층건물들이 주는 느낌은 훨씬 오밀조밀하다. 래플스 플레이스 거리에서 빌딩들의 꼭대기를 올려다보려면 고개를 한참 뒤로 젖혀야 할 정도다.

열대지방의 과일 두리안을 형상화한 문화단지 에스플러네이드. 

스탠다드차타드, 도이치뱅크, 바클레이즈, 메이뱅크 등 세계 굴지의 금융기관들이 이 곳에 아시아 본사를 두고 있거나 주요 거점으로 삼고 있다. 싱가포르는 올해 3월 런던시가 발표한 세계 금융중심지 순위에서 홍콩(3위)에 이어 4위를 차지했다. 하지만 홍콩과 싱가포르는 성격이 다르다. 남궁성 한국투자증권 싱가포르법인장은 “홍콩이 중국 시장을 겨냥한 금융 허브라면, 싱가포르는 다문화ㆍ다민족의 요소가 확실히 자리잡은 ‘글로벌’ 금융 허브”라고 말했다.

19세기 초 영국에 의해 무역 거점으로 개발된 싱가포르는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주민들이 공존하는 이민자의 도시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세계 곳곳에서 행복한 삶을 찾아 싱가포르로 향하는 사람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최근 미국 여론조사기관 갤럽이 세계 148개국 성인 35만명을 대상으로 ‘이민을 한다면 어느 나라에서 살고 싶은가’라는 조사를 한 결과, 싱가포르는 캐나다, 뉴질랜드 등을 제치고 1위를 차지했다.

세계 최대 회전 관람차인 싱가포르 플라이어에선 이처럼 새롭게 싱가포르 국적을 취득한 사람들을 위한 환영 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일년 내내 무더운 날씨의 작은 섬나라, 어찌 보면 보잘것없는 이 도시가 사람을 끌어들이는 이유는 뭘까.

사람을 향한 금융 허브

유럽계 은행 지점들이 간판을 맞대고 있다. 

이민자들이 북미와 오세아니아의 쾌적한 도시들을 마다하게 만드는 싱가포르의 매력은 도시 디자인에 있다. 이 디자인은 눈으로 보이는 디자인이 아니다. 풍요로운 삶을 살 수 있도록 해주는 도시 시스템, 즉 도시의 내적 인프라를 구축하는 디자인이다.

19세기 영국의 식민지로 대 중국 무역항에 불과했던 이 도시가 글로벌 금융 허브로 성장한 동력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해야 한다.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하는 점, 중앙집권을 기반으로 한 경제개발정책이 성공을 거둔 점도 물론 중요한 배경이다. 그러나 영어 공용화, 각종 세제 혜택, 유연한 고용 환경, 안정적 환율 같은 조건을 갖췄다고 다 금융 허브가 되는 것은 아니다.

싱가포르는 인재를 붙잡을 수 있도록 치안, 의료, 교육, 환경, 육아, 교통 등 생활과 밀착된 인프라 구축에 심혈을 기울였다. 의료 분야의 경우 바이오 산업과 의료 서비스 산업을 연계해 아시아 최고의 의료 서비스를 구축하는 데 힘을 쏟았다. 2002년 20만명이었던 외국인 환자 숫자는 2007년 46만명으로 2배 이상 증가했다. 교육 분야에서는 2002년부터 싱가포르를 세계 교육의 중심으로 육성하기 위한 ‘글로벌 스쿨하우스’ 전략을 세워 추진 중이다. 현재 싱가포르에는 유럽 최고의 경영대학원인 프랑스 인시아드를 비롯해 미국 시카고대 등 6개 대학의 분교가 있고, 존스홉킨스대, MIT 등 8개 대학의 공동학위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국회의사당 건물을 리모델링한 아트하우스 

외국계 금융회사의 싱가포르 지사에 근무하는 한 한국인 디렉터는 “싱가포르의 매력은 머리로 분석하는 것이 아니라 피부로 느끼는 것”이라며 “싱가포르는 세계 어느 나라보다 살기가 좋다. 사람 없이는 금융도 없는 것”이라고 말했다.

아트 허브를 꿈꾸다

싱가포르의 표준적 화이트칼라의 일상은 어떨까. …래플스 플레이스에서 일을 마친 후 옛 국회의사당을 리모델링한 문화공간인 아트하우스에서 이성 친구를 만나기로 한다. 아트하우스에서 전시를 감상한 후 야경을 만끽하며 앤더슨 다리를 건너 도착한 에스플러네이드. 최첨단 공연장에서 클래식 음악을 즐기고 난 뒤 댄스 그룹의 공연이 펼쳐지는 야외무대가 한 눈에 보이는 레스토랑에서 칠리 크랩을 주문한다… 어느 도시에서나 가능한 삶일 수 있다. 하지만 어느 문화권에서 온 사람이든 싱가포르에서처럼 만족스러운 문화생활을 즐길 수 있는 도시는 드물다.

싱가포르가 문화와 예술의 부흥에 관심을 쏟는 것은 산업적 측면 외에 두 가지 지향점을 갖고 있다. 하나는 싱가포르 내부적으로 다민족 커뮤니티를 통합하는 문화적 정체성을 확보하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외부적으로 싱가포르를 방문하는 사람들의 문화 소비 욕구를 충족시키는 것이다.

아시아문명박물관 

특히 후자는 금융 산업으로 유치한 고급 인재들을 싱가포르에 장기간 머물게 하는 유인 요소로 작용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싱가포르 정부는 1999년부터 유럽과 아시아를 잇는 문화예술 거점을 목표로 ‘르네상스 시티 프로젝트’를 추진하고 있다. 박물관과 도서관, 공연장 건립과 리노베이션 등 문화 인프라 구축에 이어 콘텐츠 개발에도 힘을 쏟은 결과, 문화예술 분야는 눈부신 성장세를 기록하고 있다. 아시아문명박물관과 페라나칸(중국과 말레이 혼혈 문화 및 인종)박물관 등 싱가포르의 박물관 방문객 수는 2004년 213만여명에서 2008년 650만여명으로 급증했고, 공연과 전시 등 예술 행사 역시 2004년 1만8,000여건에서 2008년 2만 9,000여건으로 늘었다.

싱가포르 정보통신예술부의 예술산업 분야 총 책임자 리우 춘 분씨는 “싱가포르는 이곳에 거주하는 외국인들이 자기 나라의 문화에도 쉽게 접근할 수 있는, 진정한 글로벌 시티를 지향한다”고 말했다. 또 “투자자가 중요하게 고려하는 것은 그 도시의 환경과 생활의 질”이라며 “금융과 예술은 시너지를 발휘할 수 있는 좋은 파트너”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10/08/26 13:06: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