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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노숙자 잡지 표지디자인 통해 재능기부 나선 ‘광고천재’ 이제석

ㆍ정의와 약자의 편에서 공공이익에 기여할 터

천둥이 치고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가 요란하더니 한 서린 울음소리가 배경음으로 깔린다. 까만 바탕화면에 쓰여진 글귀는 ‘앞이 캄캄합니다’뿐. 이어 “재해는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습니다. 당신의 도움이 필요합니다”라는 내레이션과 더불어 ‘구호의 손길은 1544-9595’라는 연락처만 적힌 채 끝나는 30초짜리 CF. 전국재해구호협회의 재해성금 모금을 위한 이 CF는 군더더기 없이 간결하게 메시지를 전달한다.


지난해 영남일보 신문 전면에는 담요 사진과 더불어 한 구석에 “오늘밤 누군가는 이 신문을 이불로 써야 합니다”라는 카피가 적힌 대한적십자사 광고가 실렸다. 명징하면서도 기발한 아이디어로, 보는 순간 확실히 각인되는 이들 광고는 세계 광고계를 점령한 기린아 이제석씨(28·사진)의 작품이다. 지방대 출신으로 국내 광고계로부터 외면당한 그는 미국 유학길에 오른 뒤 세계 무대에서 재능을 인정받았다. 세계 3대 광고제를 비롯해 유수의 광고상을 휩쓸었고 국제적 광고회사로부터 러브콜을 받고 일하며 ‘이제석표’ 광고를 알렸다. 국내에는 지난해 언론을 통해 그의 전력이 상세히 소개되면서, 좌절하던 젊은이들이 그로부터 희망을 발견하기도 했다.

그가 진행하는 프로젝트들을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보인다. 대부분 공익성 광고라는 점이다. 이뿐 아니다. 지난달부터 발간된 노숙자를 위한 잡지 ‘빅이슈’의 한국판 표지디자인 역시 그의 디렉팅을 거친다. 재능기부 형식으로 표지디자인을 제작하고 있는 그는 지난해부터 환경재단, 아름다운재단 등과 일했고 올 들어서는 재해구호협회, 생협 등과 광고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지난해 중반 ‘이제석 광고연구소’를 세우면서 독립한 뒤 현재까지 진행해온 프로젝트의 70%가 공익성 광고, 캠페인성 광고다. 사기업 광고, 상품 광고를 안하는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취지가 건전하고 광고주와 성향이 맞아떨어져야만 일을 한다.

“떼돈을 벌고 싶어서 광고를 하는 게 아닙니다. 해서 돈만 있으면 다 된다는 식의 광고주와는 일을 안합니다. 우리는 지금 광고 물량공세의 시대에 살고 있어요. 똑같은 광고가 TV를 통해, 극장을 통해, 거리광고판을 통해 상영되고 있죠. 그러나 광고의 질은 높지 않습니다. 계속 자기 이야기만 하는 광고는 대중을 피곤하고 질리게 합니다. 사고의 패러다임을 바꾸는 광고, 대중의 눈높이를 바꾸는 광고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제석 광고연구소의 영문이름 ‘제스키 소셜 캠페인’에서 그의 지향점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정의로운 광고, 이슈가 있는 광고, 약자를 위한 광고를 만들고 싶다는 그는 광고를 “사회적으로 꼭 거론되어야 할 목소리들, 약자들의 목소리와 부당함을 대변하는 채널”로 정의했다. 그에게 광고는 곧 메시지이고, 곧 뉴스다. 프로보노 등 공익성 광고와 캠페인에 관심을 두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비록 수익은 나지 않지만 가치관이 맞는 NGO들과 함께 일을 한다는 사실 자체가 즐겁다.

그가 광고를 만드는 두 가지 원칙은 이렇다. 목표는 대중과의 소통에 두고, 사실을 다른 관점에서 재해석하되 없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가 만든 광고가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고, 메시지가 분명한 것은 바로 이 같은 원칙하에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그는 상대의 폐부를 깊이 찌르는 날카로운 칼날 같은 광고의 아이디어는 “틀에 얽매이지 않는 데서 나온다”고 했다.

“세상을, 사물을 보는 관점을 달리하면 다른 해결방법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술을 그저 술이라 보는데, 술은 어떤 이들에게는 진통제이기도 하고 수면제이기도 하고 또 사람과 사람 사이의 윤활유이기도 하죠. 독이 때에 따라서는 약이 되기도 합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보는 훈련을 해야지요. 창조와 파괴는 같은 맥락에서 봐야 합니다. 무언가를 만들면서 계속 깨뜨리는 연습을 하는 가운데 다른 새로운 것이 생겨납니다.”

사람들을 관찰하거나 인문학 서적을 읽을 거라는 예상과 달리 그는 명상으로부터 아이디어의 단초를 얻는다고 했다. “브레인스토밍은 뇌의 활동적인 부분을 자극하기는 하지만 여러 사람이 모인다고 해서 깊이있는 아이디어가 나오는 것은 아니지요. 깊이와 폭을 다 건드려야 합니다. 깊이 있는 생각을 끄집어내기 위해 명상을 합니다. 6시간이고 10시간이고 앉아 있습니다.”

아트디렉터로 출발한 그는 현재 공공의 가치를 전달하는 소셜 디자이너로 변신 중이다. 공익 캠페인의 기획단계서부터 참여해 관련광고제작, 관련상품의 기획 및 패키지디자인까지 일관성있게 만들고 이를 통해 일관된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다. 실제 그는 올해 초 공정무역 초콜릿 광고에 기획단계부터 함께 참여해 ‘정직한 거래, 정직한 맛, 정직한 가격’이라는 문구를 패키지에 붙인 ‘초코렛’을 내놓았다. 물량은 금세 동이 났다.

“저는 50년, 100년을 갈 광고를 만들고 싶어요. 광고는 물론이고 기획, 관계설정, 진행, 모금까지 공익캠페인 컨설팅에 관심이 많습니다. 브랜드 통합과 소셜디자인도 함께 말이죠. 캠페인을 디자인화, 상품화하는 거지요. 먹고 입고 쓰는 일상용품을 통해 공공성의 메시지를 광고하는 겁니다.”

올 가을부터 미국의 대학원에 진학해 그래픽 디자인을 공부하기로 한 것도, 지역사회와 연계해 지역발전 프로그램에서 디자이너의 역할과 공공커뮤니케이션에 대해 심도깊게 파고들고 싶어서다. 그의 꿈은 원대했다.

“국제적 시민단체, 비영리기구들과 작업하고 싶습니다. 이들 활동의 취지와 목적을 대중에게 알리고 광고의 측면에서 재밌게 풀어나가 대중의 관심을 환기하고 궁극적으로는 공공의 이익을 증대하는 역할을 하고 싶어요. 중심은 아시아에 둬야지요. 가장 활발하게 활동하는 곳은 반응이 빠르고 대중의 수준이 높은 한국이 될 겁니다. 앞으로 유엔을 비롯해 세계적 공익기관들이 저를 찾아오도록 해야지요.”

글 윤민용·사진 김기남 기자 vista@kyunghyang.com
|경향신문 | 입력 : 2010-08-17-21:40:22ㅣ수정 : 2010-08-17 21:4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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