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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10>뉴욕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10>뉴욕-기억의 재창조, 새로운 경쟁력이 되다

버려진 고가철도에 '하늘 공원' 조성… 21세기 센트럴파크로
뉴요커들이 시민단체 만들어 공사비 모금·각종 행사 운영
총 2.3㎞중 800m 1차 개장 1년 만에 200만명 다녀가
주변 육가공 공장·도축장엔 패션 매장·레스토랑 등 들어서

 

하이라인 공원 한편으로는 허드슨강의 풍경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고, 반대편엔 도심 빌딩들이 진을 치고 있다. 평범한 보도처럼 보이지만, 지상 9m 높이 위에 뻗어 있는 산책로다. 

뉴욕 맨해튼의 역사성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은 자로 잰 듯 가차없이 뻗은 바둑판 구조의 도로망일 터. 이 칼날 같은 블럭들은 불과 200여년 만에 거의 맨땅에서 솟구친, 과거 없는 인공의 도시 뉴욕을 증언한다. 세계의 경제ㆍ문화ㆍ예술의 중심지로서 '파괴와 창조'라는 역동성으로 쉼없이 달려온 이 괴물 같은 도시가 이젠 스스로에게 브레이크를 걸며 외치고 있다. "우리에게도 지키고 보존해야 할 과거가 있다"고.

놀랍게도 그것은 낡은 공장, 빛바랜 건물, 그리고 용도폐기된 강철의 철로 따위다. 아무 것도 아닌 것을 예술로 탈바꿈시킨 앤디 워홀의 도시, 뉴욕은 산업화의 덧없는 잔재마저 도시 유적으로 재생시켜 세계를 다시 놀라게 하고 있다. 냉정하게 보면 이는'보존'의 이름으로 도시 공간을 재활용하는 또 다른 방식의 도시 혁신인데, 뉴욕의 부정하기 어려운, 매혹적인 역동성의 업그레이드된 버전이다.

시민 휴식터로 탈바꿈한 낡은 고가철도

허드슨강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화창한 날씨인데도 힘찼다. 머릿결이 뒤엉키고 옷자락이 펄럭였고, 때로 발걸음을 멈추게 할 정도로 강한 돌풍도 일었다. 갈대숲은 바람결을 따라 누웠다. 선데크에 누운 비키니 차림의 여성들, 웃통을 벗은 맨가슴의 남성들은 대낮의 강렬한 햇살과 시원한 강풍을 한가로이 즐기고 있었다.


허드슨강의 해변 풍경을 말하는 게 아니다. 주변엔 정육 공장, 공영주차장 등이 내려다 보이고 붉은벽돌의 빌딩들이 얼기설기 늘어선 여기는 엄연한 도심 속, 덧붙이자면 건물 3~4층 높이쯤 되는 곳이다. 바로 뉴욕의 새 명소로 떠오른 맨해튼 남서쪽의 하이라인(High Line) 공원이다.

지난해 6월 1구역(길이 800m)을 우선 개장했는데 불과 1년여만에 200만명의 시민과 관광객들이 이곳을 찾았다. 지상 9m 높이에서 건물들 사이를 헤집고 쭉 뻗은 폭 10여m의 공원 산책로는 콘크리트 블록과 강철 철로, 무성하게 자란 잡목과 덩굴, 야생화들이 한데 어우러져 있다. 인공과 자연이 기묘하게 콜라주된 풍경이다.

애당초 이곳은 1980년대부터 버려져 있던 고가철도였다. 지역 이름에서 벌써 육고기 냄새가 나는 미트패킹(meatpacking) 디스트릭트의 갱스부르가에서 북쪽으로 허드슨 강변을 따라 34번가까지 총 2.3km 길이로 이어진 하이라인은 1930년대 육가공업체가 밀집했던 미트패킹 지역에서 육류와 우유 등의 화물을 수송하기 위해 설치됐다. CSX라는 운송회사가 소유했던 이 철도는 육류 산업이 쇠퇴하면서 이용이 중단돼 방치됐고, 녹슨 철도와 잡목이 뒤범벅되면서 거대한 산업폐기물로 전락했다.

허름한 공장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둔 첼시 마켓. 

뉴요커들, 왜 철로 보존에 나섰나

1990년대 후반 뉴욕 시당국이 이 흉물을 철거하려 하자 놀라운 움직임이 태동했다. 주변 주민들이 1999년 '하이라인의 친구들'(FHL)이란 단체를 만들어 옛 철도 보존에 나선 것이다.

이들의 활동을 단순한 가두 피켓 시위 수준으로 생각하면 오산이다. 하이라인 공원 1구역과 현재 공사가 진행 중인 2구역(800m)에 투입된 총 공사비용은 1억 5,200만달러. 이 중 30% 가까운 4,400만 달러가 이 단체가 직접 모금한 돈이다. FHL의 디자인 및 기획 담당 선임연구원인 패트릭 하자리씨는 "100만~200만 달러를 내는 큰 기부자도 있는가 하면 1년에 몇십 달러씩 내는 이도 있다"며 "회원은 6,000명가량으로, 기부금액은 다양하다"고 말했다. 공원 조성 후 FHL은 시당국을 대신해 공원을 직접 관리하면서 각종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공원 운영비의 70%도 이 단체가 마련하고 있다.

뉴욕시가 아니라 주민들이 거의 모든 밥상을 차린 것이다. 뉴요커들을 이끈 이 힘은 무엇일까. 하자리씨는 "이곳은 우리 어린 시절 기차가 다니던 곳이었고, 폐선 뒤는 놀이터이기도 했던 추억의 장소"라며 "유럽 도시의 역사적 공간이라면 고성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젊은 도시 뉴욕에 과거란 산업화의 유물들인데, 그것을 공공장소로 보존ㆍ활용하는 것은 과거를 기억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있는 일"이라고 강조했다.

과거 도축장이었던 미트패킹 지역 건물들에는 고급 패션 매장과 레스토랑 등이 입주해 밤을 밝힌다 

도축장은 부티크로, 과자공장은 쇼핑몰로

과거를 기억하려는 뉴요커의 욕망은 이 공원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다. 하이라인의 시발점인 미트패킹은 육가공 공장과 도축장이 한때 200여 개나 밀집했던, 미국에서 세 번째로 큰 정육산업 지역이었다. 땅값 상승으로 공장들이 교외로 나가면서 퇴락한 이 지역은 2000년대 들어 180도로 변신했다. 고급 패션 매장과 부티크, 레스토랑 등이 빛바랜 붉은벽돌 건물로 하나 둘 입주하기 시작하더니, 나이트클럽까지 들어서며 뉴욕의 가장 뜨거운 지역으로 떠오른 것이다.

느지막한 오전,'섹스 앤 더 시티'의 여주인공들이 즐겨찾던 레스트랑 파스티스의 야외 테라스에서 브런치를 먹는데 길거리에서 카메라를 든 스태프들의 움직임이 분주했다. 무슨 촬영이 있냐는 물음에 웨이트리스는 "여기선 수시로 촬영 장면을 볼 수 있다"며 별 관심없다는 투다.

세계의 첨단 유행을 이끄는 뉴요커들이 왜 하필 도축장이었던 곳을 찾는 것일까. 이 지역 상인연합체인 미트패킹 이니셔티브(MPDI)의 줄리안 크라인씨는 "언뜻 이해할 수 없겠지만 퇴색한 옛 건물들이 맨해튼에선 흔히 볼 수 없는 유니크한 풍경을 제공한다"고 말했다.

미트패킹 북쪽에 인접한, 식자재 쇼핑몰로 유명한 첼시 마켓도 유명 비스킷 회사 나비스코의 대형 과자공장을 개조한 곳이다. 공장 내 28개의 벽을 터서 하나의 공간으로 만든 곳으로, 낡은 벽돌과 파이프, 지붕의 환풍기 등 과거 공장의 흔적을 그대로 살려둔 디자인이 오히려 소비자들을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뉴요커들이 새것에 금방 싫증을 느끼고 복고적이 됐다는 뜻은 아니다. 크라인씨는 "옛것 속에서 새로움을 발견하는 것"이라고 명쾌하게 말했다.

공원으로 바뀐 하이라인이 미트패킹 지역을 가로지르고 있다.'하이라인의 친구들' 제공

'기억의 보존'이 도시 경쟁력 강화

산업화의 기억을 보존하면서 도시 공간을 재활용한 하이라인의 성공은 지역 경제에도 활기를 불어넣고 있으며 미국, 아니 전 세계의 도시들에도 큰 자극제가 되고 있다. 하이라인이 통과하는 과거 대부분 공장지대였던 곳에는 갤러리와 식당, 호텔 등이 잇달아 들어서고 있다. 미국 현대미술의 메카인 휘트니미술관도 하이라인 남단 입구 쪽으로 이전을 추진하고 있다.

1930년대 화물 열차가 운행되던 하이라인. ‘하이라인의 친구들’ 제공 

FHL에는 하이라인의 공원화 과정을 배우려는 세계 각 도시 관계자들의 문의 전화가 폭주한다. 오세훈 서울시장도 지난해 이곳을 방문했다고 한다. 로테르담, 홍콩, 싱가포르, 파리 등의 도시정책 관계자나 개발업자들의 방문도 끝없이 이어지고 있다. 뉴욕타임스는 지난달 14일자에 "하이라인이 베이글처럼 뉴욕의 또 다른 종류의 수출품이 되고 있다"고 대대적으로 보도하기도 했다.

뉴욕= 글·사진 송용창기자 hermeet@hk.co.kr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10/08/04 21:05:07  수정시간 : 2010/08/05 10:46: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