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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서] 〈12〉 그라피티

도시 곳곳 뒤덮은 길거리 낙서 반달리즘이냐… 예술이냐…

“모두 감옥에 보내버려야 해요. 세상 어느 도시를 이 지경이 되도록 방치한답니까.”
밀라노 출신인 조르조 아르마니는 그라피티(graffiti·공공장소에 하는 낙서)로 얼룩진 밀라노를 비판하며 도시의 품위를 찾을 수 없다고 불평했다. 젊은 세대를 타깃으로 젊은 문화가 활발히 형성된 밀라노의 포르타 티치네제 거리에 매장을 연 아르마니는 이렇게 덧붙였다. “이 지역을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열긴 했지만 매장에는 제발 들어오지 말아줬으면 하는 모양새의 사람들이 거리에 가득하더군요. 품위가 있는 사람들이 지나다녀야 운영이 잘 되는 거거든요. 그렇지 않으면 매장의 매력이 떨어져요.”

레온카발로 소셜 공간. 그라피티로 구석구석이 도배되어 있다.

개성 가득하고 자유로운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 많은 사람이 찾는 포르타 티치네제 거리에는 온몸에 문신과 피어싱을 한 앳된 얼굴의 청소년들이 들끓고, 거리에서 술을 병째 마시거나 마리화나를 피우며 모여 있는 젊은이들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하루가 멀다 하고 거리공연이 펼쳐지고 주말엔 발 디딜 틈이 없을 정도로 많은 사람이 모여든다. 새로운 상권이 형성되며 부동산 가격은 세계 몇 번째로 꼽힐 만큼 올랐지만 젊은 문화지역만의 특색은 다행히 잃지 않았다. 높은 가격을 치르며 이 거리로 들어간 패션계의 노장은 자신과 어울리지 않는다고 참을 수 없다는 듯 투덜거렸지만 그의 불평은 그리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한동안 잊혀졌던 사건. 일명 ‘쥐벽보’라고 불리는 그라피티를 그려 기소된 사람들을 구명하기 위한 탄원서를 요청하는 글이 인터넷을 훑고 지나갔다. 2010년에 개최된 G20(주요 20개국) 정상회의 홍보물 포스터에 G(쥐) 그림을 그려 넣은 죄로 두 사람이 얼마 전 10개월, 8개월을 각각 구형받았다고 한다. 사건 당시엔 전국을 떠들썩하게 했지만 당연히 훈방이나 벌금 조치 후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원래의 자리를 찾아 돌아들 갔을 거라고 여겼기에 얼마 전 탄원서를 모은다는 소식을 듣고는 마음이 착잡해졌다.

당연히 많은 예술인이 민주주의와 표현의 자유에 대한 위협이라고 느꼈고, 영화감독 이창동과 박찬욱 등이 표현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는 내용의 탄원서를 써 보냈다고 한다. 표현의 자유라는 이름 아래 버젓이 성조기를 태우는 장면을 종종 접하는 우리는 당연히 그런 권리가 우리에게도 있다고 착각했던 건지도 모른다. 그런데 사실 그들이 훼손한 것은 국기도 아니고, 공공이나 사유 건물도 아니고 일개 포스터가 아닌가. 선거철에 정치적인 목적으로 특정 후보의 얼굴을 오려 내거나 낙서를 한 것도 아니고 포스터의 청사초롱 자루 끝에 쥐를 그려 넣었던 게 그들의 죄라고 한다.

뱅크시의 그라피티. G20 홍보물에 그려 넣은 쥐는 그의 작품에서 도안을 따왔다고 한다.

홍보물 포스터에 남긴 쥐 그림. 사실 유럽에서는 뉴스거리도 안 될 법한 일이다. 이탈리아만 해도 도시 곳곳을 뒤덮은 그라피티는 작품부터 청소년들의 낙서까지 다양하며 공공건물과 기업의 피해액은 연간 천억원을 훨씬 웃돈다. 지하철, 전철, 정류장뿐 아니라 천년이 훌쩍 넘은 고성의 성벽까지 그 피해를 보고 있다.

1500년 된 성벽에도 스프레이로 “○○야 사랑해”라는 낙서를 거리낌 없이 갈겨쓰는 청소년들 때문에 골치가 아픈 이탈리아 정부는 낙서를 하다 검거되는 현행범에게 1000여 만원 상당의 벌금을 물리기로 결정했지만 개선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한 통계에 따르면 이탈리아에는 10∼11세부터 스프레이나 물감 묻힌 붓을 들고 외벽에 낙서를 하고, 13세부터 18세 사이 청소년 두 명 중 한 명은 적어도 한 번 이상 그라피티를 시도했다고 답할 정도이다.

도시별로 평균 1년에 400억원을 그라피티를 지우거나 반달리즘의 공격을 받은 공공물을 보수하는 데 사용하고 있고, 밀라노 교통회사 ATM은 파손된 유리를 가는 데에만 매년 40억원 넘게 쓴다.

기차에 그려진 그라피티의 오리지널 스케치(1978년 작, 블레이드 작품).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협력전시를 통해 공개될 예정이다.

‘쥐 벽보’를 두고 검사는 “이것은 단순한 예술적 행위가 아니라 반정부 운동의 일환”이며 그라피티 자체보다 “G20 행사를 훼방 놓는 운동을 용납하는 논리가 되는 게 문제”라고 말했다고 한다.

“예술창작에서는 어떤 것도 ‘불법’으로 간주될 수 없어요!”

올해 6월에 개최될 국제 미술행사인 베니스비엔날레의 커미셔너인 비토리오 스가르비가 밀라노시의 문화국장을 지내던 시절, 철거 위기를 맞은 레온카발로(레온카) 소셜 공간을 변호하며 한 말이다. “점잔빼는 부류에게야 다른 시각에서 보이겠지만 ‘레온카’는 창작을 하는 공간이에요. 밀라노 현대미술의 현주소를 볼 수 있는 곳이죠. 30년쯤 후에는 과거의 미래주의 운동이 그랬던 것처럼 예술사적인 가치를 인정받을 겁니다. 그만큼 재능 있는 작가들이 보이지 않습니까.”

근대미술에서 빼놓을 수 없는 큰 획을 그었던 다다와 초현실주의의 예술가들도 지난 세기에 반문명, 반합리적인 예술을 주창하며 권위에 도전하고 대중을 선동했던 젊은 무명 예술가들이었다. 그리고 그라피티 미술은 처음부터 사회의 부조리를 꼬집고 불만을 표출하는 진한 정치적인 색채를 담고 시작되었으니 정치성을 문제 삼은 검사의 주장은 사과가 둥글다는 당연한 지적으로 들릴 수밖에 없다.

물론 그라피티 작업이 수반하는 불법적인 행위를 옹호하려는 것은 아니다. 뛰어난 예술성을 가진 그라피티 작가와 재능이 없는 작가를 구분해 내는 작업 또한 쉽지 않은 일이다.

호기에 들뜬 청소년들의 재미 섞인 낙서나, 무정부주의자, 네오나치 등의 정치적인 선동 메시지 등에서 그라피티 작가의 사인을 어떻게 구분해 낼 것인가의 문제 역시 여전히 그라피티 미술과 반달리즘의 경계를 명확하게 나누지 못하고 모호하게 버려져 있다. 유명한 그라피티 작가 뱅크시의 반대 입장에 선 이들이 주장하듯 뱅크시가 어디에나 그의 그라피티 그림을 그릴 자유를 가진다면 스프레이 통을 손에 쥔 아이들에게도 똑같은 권리를 줘야 하기에 문제가 될 수 있으며 “그가 유명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의 사유재산을 훼손할 권리를 가지진 않는다”는 사실도 공감이 갈 만한 내용이다. 몇몇 국가에서는 미성년자에게 스프레이를 판매하는 것 자체를 금지하기도 한다.

트롱프뢰유(눈속임 벽화). 올리비에와 아그네스 코스타의 작품으로 에두아르드 아담 광장에 위치해 있다. 건물의 빈 측면 벽에 가상의 두 건물을 그려 넣은 벽화. 실제 건물과 그림의 차이를 구별하기가 힘들 정도로 정교하게 제작되었다. 몽펠리에 출신의 인상주의 화가인 프레데리크 바지유가 왼쪽 건물 2층 발코니에 붓을 든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벽화는 저렴한 비용으로 도시 환경을 개선할 수 있는 뛰어난 방법이다.

밀라노시는 그라피티와 반달리즘(vandalism·문화나 예술을 파괴하는 행위)을 전담하는 경찰팀을 운영하며 처벌에 강경한 입장을 취했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문화부 예산으로 그라피티 미술품 전시를 지원하거나 기업이나 문화재단이 버려진 공장이나 빈 담벼락을 그라피티 작가들에게 개방하도록 장려하기도 했다.

토리노시는 그라피티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도시 미관을 재정비하는 프로젝트를 벽화 예술을 뜻하는 합성어 ‘무라르떼’라는 이름으로 발족시켰다.

무라르떼는 때론 불법적으로 표출되는 그늘에 감춰진 젊은 층의 예술 감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여 잠재된 젊은 창작 표현을 강화시킴과 동시에 저렴한 비용으로 도시 미관을 가꾼다는 두 가지 목적을 추구하는 프로젝트이다. 2000년에 시작되어 현재까지 버려진 공장지대와 우범지역을 크게 개선하는 효과를 올렸다.

“레온카는 현대의 시스티나 성당이에요.”

그라피티 예술을 미켈란젤로를 비롯한 르네상스의 거장이 그린 프레스코화에 비유하는 혁신적인 입장을 표명한 비토리오 스가르비는 ‘열린 하늘 아래의 미술관’이라는 제목으로 그라피티 작품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반달리즘이냐 예술이냐의 논란은 아직 긴 여정을 거쳐야 할 것으로 보이지만 올해 베니스비엔날레 국제 미술행사 기간 중에는 미국 민속미술관이 베네통과 파트너십을 맺고 초기 미국 그라피티 작가들의 전시를 비엔날레 협력전으로 기획해 선보일 예정이라고 한다.

처음엔 불법적인 낙서로 도시를 더럽힌다는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현재는 그라피티 예술의 선구자로 인정받는 블레이드, 샤프, 퀵, 헤이즈 등의 작품이 그라피티의 오리지널 연필 스케치와 함께 전시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예술이라는 울타리 안에서는 누구나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릴 수 있었으면…’ 하는 작은 바람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선조도 마당극에서 탈을 쓴 배우들이 양반을 비꼬고 희화화했지만 경쾌한 애교로 보고 즐기지 않았는가. 마음의 여유와 이해가 필요한 때이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입력 2011.02.13 (일) 11:12, 수정 2011.02.13 (일) 15: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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