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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건축가들 ‘상식없는 현실’에 반기 들다

새건협, “예우개선” 성명 발표
준공식 초대커녕 거명도 안돼
표지석에도 건설회사 이름만
“설계자 실명표시 제도화해야”
   
 

» 최근 개관한 안중근기념관. 설계자 김선현·임영환 건축가는 준공 테이프 커팅에 참여하지 못했다. 박영채 건축전문사진가 제공

# 나라밖 풍경 독일 최고의 공간이자 최근 가장 주목받은 세계적 공공건축물로 꼽히는 베를린 국회의사당 리노베이션 준공식. 새 의사당의 열쇠를 국회의장에게 건넨 사람은 리노베이션을 맡은 영국 건축가 노먼 포스터였다. 하나 더. 올해 준공된 로마의 새 명물 국립현대미술관 준공식 초청장에 적힌 공식 초대자는? 이탈리아 문화부 장관도 미술관장도 아닌 건물의 설계자 이라크계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였다.

# 대한민국 풍경 17일 오전, 한국 주요건축가들의 대표 단체 격인 새건축사협의회의 기자회견장. 함인선 새건협 회장은 침울한 표정으로 성명서 첫 문장을 읽기 시작했다. “작가 없이 출판사와 인쇄소 대표만 참석하는 출판기념회를 보셨습니까? 조각가를 초청하지 않고 이뤄지는 제막식을 상상할 수 있습니까?” 그런 ‘상상할 수 없는 일’이 우리나라에선 버젓이 일어나는 것을 건축가들이 스스로 까발리는 자리였다. “…국립중앙박물관 개관 리셉션에 건축가는 초청되지 않았고, 상암 월드컵 경기장 준공식 때에도 건축가의 이름은 호명조차 되지 않았습니다.”

공공건축물을 문화예술 작품이 아닌 건물로만 보는 현실에 건축가들이 정면으로 문제를 제기하고 나섰다. 새건협이 주축이 되어 대한건축가협회 이상림 회장과 대한건축사협회 최영집 회장, 국가건축정책위원회 위원들인 김광현 서울대 건축학과 교수와 류춘수 건축가 등이 17일 서울 프레스센터에 모여 ‘건축가의 자리가 없는 사회를 통탄한다’는 성명을 발표했다.

이 기자회견은 최근 개관한 안중근기념관 준공식이 촉발이 됐다. 안중근기념관 준공식에 설계자인 김선현(디림건축 대표)·임영환(홍익대 교수) 건축가의 자리는 없었고 테이프 커팅에도 참여하지 못한 사실이 건축계에 알려지면서다. 건축문화를 선도하고 한 나라의 문화수준을 반영하는 대표적 공공건축물에 정작 건축가들이 도면 그리는 용역업자 수준으로 취급당하는 현실에 대한 공식적인 문제제기가 필요하다는 의견이 모여 기자회견이 마련됐다. 
  

» 상암동 월드컵경기장. 준공식 대통령 축사에서 대통령이 감사를 표시한 세 사람은 서울시장, 축구협회장 그리고 시공 건설회사 대표였고 설계자 류춘수 건축가의 이름은 빠졌다.<한겨레> 자료사진 

함인선 회장은 “21세기 문화강국을 지향하고 지식서비스산업을 강화하는 것이 대한민국 미래의 희망이라고 모두들 주장하지만 건축가들 같은 문화창조자들이 무시당하고 저작권이 보호받지 못한다면 ‘문화강국 대한민국’은 공허한 구호가 되고 말 것”이라고 성명서 내용을 강조했다.

회견에 참석한 원로 건축가 유걸씨는 “건축물은 소유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사용하기 위한 것이며, 우리의 문화적 생활과 환경을 구현하기 위한 것이므로 그 내용을 만드는 작업을 누가 하는가에 대해 사회가 함께 생각해봐야 한다”고 지적하고, “건축가와 건축에 대한 몰이해는 건축의 비극이 아니라 사회의 비극이며 이런 문제에 대해 공공건축을 책임지는 정부와 지자체, 공공기관이 인식을 바꿔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날 참석한 주요 건축단체들은 앞으로 모든 공공건축물에 설계자 실명이 표시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적 장치 마련 촉구와 건축에 대한 사회의 인식을 높이는 문화운동 차원의 캠페인을 공동으로 펼쳐나갈 예정이다. 구본준 기자 bonbon@hani.co.kr

기사등록 : 2010-11-17 오후 08:25:30  기사수정 : 2010-11-17 오후 09:1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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