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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G.하그로브] 농촌 디자인 탐구

[Gabriel Hargrove] The rural design vernacular objects that expose agency
[G.하그로브] 농촌 디자인 탐구 

글. 게이브리얼 하그로브(Don Norman)

베스트 메이드 컴퍼니(Best Made Company), 도끼

예나 지금이나 농촌 생활에서 도시 디자인의 아이디어를 얻는 사례들은 꾸준히 있었다. 디자이너 아킬레 카스틸리오니가 자노타 사를 위해 디자인한 메차드로(Mezzadro) 의자나, 베스트 메이드 컴퍼니의 도끼를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이들 디자인의 뿌리에는 농촌 생활의 자치성, 풍성한 자연자원이라는 낭만적인 감수성이 가미된 자급자족의 정신이 자리잡고 있다. 이와 동시에 독립적인 삶의 수단으로 자리매김한 이들 사물은 ‘비전문적이면서도 창의적인 방식으로, 의도를 가지고, 직접적으로 삶의 환경에 영향을 미치는 능력’을 뜻하는 에이전시(agency)를 보여주기도 한다.

에이전시의 증진은 크게 세 가지 효과를 가져온다. 첫째 자원 활용성과 자급능력을 확대하면 ‘그린’ 디자인의 극대화라는 일대 전환이 가능하다. 둘째, 에이전시는 요즘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운 시기에 개인 사업의 성장에 도움이 될 수 있다. 마지막으로 디자이너들이 농촌의 자생적 에이전시에서 영감을 얻어, 자급성을 높이 평가 받는 디자인들(가령 미국 농촌의 생활 디자인)을 통해 자기 문화권에 고유한, 또 아직 미개척 분야의 제품들을 생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스타판 홀름(Staffan Holm), 밀크 스툴

(왼쪽) 파트리시아 우르키올라(Patricia Urquiola), 욕조
(오른쪽) 엘리자베스 레리쉐(Elizabeth Leriche), 콘셉트

농촌의 지역성이란 자급자족적 라이프스타일에 대한 낭만적인 환상을 불러 일으키곤 한다. 예를 들어, 농촌 생활이라 하면 우유를 짜는 일이나 날짐승 사냥, 그리고 이런저런 밭일들을 떠올리게 된다. 그래서 많은 디자이너들이 우유짜는 데 필요한 스툴이나 엽총, 셀비지 데님, 고무 부츠 디자인에 빠져 들었다. 이 물건들은 독립과 자치의 분위기를 지녔다. 웰링턴 스타일의 부츠는 미국 중류 이민 계층인 젠트리의 상징이었지만, 지금은 ‘목가적 쉬크’의 이미지를 불러오는 물건이다. 하지만 이제는 그저 이미지의 창조가 아니라, 농촌 그 자체에 대한 연구가 절실하다.

농촌의 사고 방식이나 제작 습관이 실제 디자인에 어떤 영향을 가져올 수 있을까? 이를위해 필자는 ‘농촌 지역의 버내큘러 사물들(Objects of the Rural Vernacular)’라는 프로젝트를 통해 에이전시의 특성들을 관찰해보았다.

무엇이 미국 디자인인가?

프로젝트를 시작하며 우선 도시-농촌이라는 이분법의 문제를 떠올렸다. 대부분의 미술, 디자인 관련 담론들은 도시와 관련되어 있고, 농촌 지역에서 ‘하이 디자인’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인터넷을 제외하면) 매우 제한적이다. 대형 쇼핑 센터나 아울렛 이외에 디자인 쇼룸이나 최신의 급진적 성향을 보여주는 갤러리들을 구경하기란 더더구나 쉽지 않다.

사실 농촌 디자인 탐구의 대상은 농촌 공동체에서 제작된 상품이 아니라 바로 그들의 생활 방식이다. 농촌 주민들 중에는 농기구나 기타 생활 필수품들을 만들 수 있는 비전문 디자이너들이 존재한다. 전시 ‘이상하게 익숙한 : 디자인과 일상(Strangely Familiar: Design and Everyday Life)’을 기획한 앤드류 블로벨트(Andrew Blauvelt)는 “일상은 실제 사용이 일어나는 장소, 디자인이 타협해야 하는 어수선한 현실의 공간”이라고 말한다.

미국 농촌의 삶을 가장 훤히 아는 사람은 아마도 미 농림부 소속의 농가구 담당자, 캘빈 빌(Calvin Beale)일 것이다. 빌은 미국의 농촌이 흔히 ‘맨발의 거칠고 투박한, 일하기 싫어하는’ 이미지로 잘못 인식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계속해서 그는 “전문적인 기술을 가지고 양호한 소득 수준을 유지하는, 소위 ‘신농(new gentry)’이라 할 ‘농촌 정주자들(homesteaders)’은 자급자족적인 단순한 삶을 지향한다. 이들 사이에는 환경주의, 보존, 대체에너지, 농촌 미학의 가치, 홈 푸드, 지역 자치에 관한 관심이 폭넓게 확산되어 있다”고 덧붙인다. 이처럼 농촌 생활에서 기인한 또 그들의 디자인에 의해 그 가치와 기술이 더욱 분명한 의미를 얻어가는 제품들은 모두 ‘에이전시’에 관련되어 있다.

농촌의 사물들에는 독특한 미국성이 담겨 있고, 대개가 도시 생활에서 찾아보기 힘든 디자인적 가치를 보여준다. 도시민들이 검약이나 질서, 절제를 개인화한 사물을 접할 수 있는 기회가 과연 얼마나 될까?

엔초 마리(Enzo Mari), ‘자가디자인(Auguprogettazione)’

DIY

소위 적합한 디자인이라 하는 범주의 바깥에 위치하면서도, 개인의 자치성에 직접 다가가는 방법이나 기준들이 사실상 존재한다. DIY 운동은 이러한 자치성을 반영한 사례다. DIY 작업에 참여하는 사람은 디자인 리서치, 실행, 반응의 전 디자인 과정에 직접적으로 관여하게 된다. 이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DIY는 최소한 사용자와의 교환 기회를 제공한다. DIY 제작자(겸 사용자)들은 자신만의 문제 해결 ‘에이전시’를 가지고 제작 프로세스에 관여하기 때문이다.

한편 블로벨트는 DIY의 한계를 지적한 바 있다. “DIY 제작자(겸 사용자)들은 반드시 디자인에 대해 비판적 접근을 할 필요도, 일상의 본질적 조건을 분명하게 들춰내야 할 이유도 없다. 제작자들은 DIY가 제시한 일정한 조건과 상황을 받아들여야 한다. 또 DIY가 사물과 사용자 간의 관계성을 바꾸지도, 전통적인 디자인 관념에 도전하지도 않는다는 점에서 DIY는 이미 규정된 것이다.” 오늘날 DIY의 상당수는 60년대 후반의 텍스트(파이어폭스 시리즈 또는 홀 어스 카탈로그)에 대한 재해석이다. 대체로 설명서 형식으로 된 이 책들은 전반적인 다이어그램만을 제공하고 있어서, 사용자들은 얼마든지 변형을 가할 수 있다. 즉흥적인 시도로 일어난 미세한 변형과 적용 사례들을 관찰한다면 블로벨트가 염려하는 문제들이 보다 잘 드러날 것이다.    

전통적인 소재를 이용한 가구 만들기 기법을 소개했던 엔초 마리의 ‘자가디자인’을 살펴보자. 재판본에 담긴 인터뷰에서 엔초 마리는 디자인 작업이 성역이 아닌 ‘창조적 일반(Creative Commons)’의 것이며, 디자인을 비전문적 즉흥-디자이너 커뮤니티를 만드는 수단으로 이용한다고 이야기했다. 그의 논리는 단순하다. “모든 사람이 저마다의 프로젝트를 가져야 한다. 이것은 개인이 [외부에 의해] 디자인되지 않는 최선의 길이다.” 더불어 “결과물은 물론 사용이 될 수도 있지만, 그 교육적인 가치로 인해 중요성을 갖는다”고 말하며 이 프로젝트는 교육적인 의미를 강조하고 있다. 다시 말해, 디자인 제품이 비판적인 접근 양식, 사고와 태도를 불러일으킬 때 비로소 의미를 얻게 된다.  

‘농촌 지역의 버내큘러 사물들’

필자는 농촌의 전통에 관한 탐구에서부터 DIY 문화까지, 소위 지역적 사물들이라 이름 붙은 오브제 시리즈를 연구, 개발해왔다. 특히 미국 남동부 애팔래치언 문화의 경우를 중심으로, 갖가지 텍스트에서 얻어진 사물들을 현대 디자인의 논의로 끌어들였다. 산업 소재나 제조 방식을 사물에 적용해보는 시도들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결과물은 사물에 대한 소유권 이상의 의미, 즉 사용자와의 관계성을 가져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자체 진단이 가능할 정도의 집단적 힘이 모여야 한다.


게이브리얼 하그로브(Gabriel Hargrove), ‘자유주의자 너구리덫(Libertarian Raccoon Trap)’ - 대니얼 비어드(Daniel Beard)의 <소년을 위한 입문서 Handy Book for Boys> 중에서

오브제 시리즈 가운데 ‘자유주의자 너구리덫’은 사용자들이 사물을 통해 얻을 수 있는 에이전시를 생각해 보도록 하는 디자인이다. 여기에서 덫은 해로운 동물을 잡으려는 의지를 가로막는 마을의 규율을 우회적으로 드러내는 비판적 디자인의 결과물이다. 이 물건은 실제로 동물을 해하지도 규율을 어기지도 않는다.

오브제 시리즈의 전반적인 구성은 대니얼 비어드의 <미국 소년을 위한 입문서>에 근거하고 있지만 가공된 목재나 기존 오브제를 소재로 활용하는 방식은 도시 환경에 적합하게끔 변형된 것이다. 사실 비어드가 제안한 소재들은 실제 구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고, 도시에서는 사용이 불가한 경우도 있다. 국립공원에서나 가야 구할 수 있는 소재들 대신, 나는 이어 붙이거나 평평하게 가공한 판재, 하드웨어 숍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나사, 낡은 VCR 등으로 이를 대체했다.

에탄올 증류기

에탄올 증류기는 애팔래치아 지역에서 전통적으로 직접 손으로 제작해 온 철제 알콜 증류기를 응용한 것이다. 증류기의 기둥을 간단히 움직여, 식용 에탄올과 연료를 모두 생산할 수 있는 유용한 장치다(물론 여기에는 에틸 알콜이 대체 연료나 술로 소비되는 데 대한 합법성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두 가지 경우 모두 소비자들은 비록 제한적이긴 하지만 상품의 가치를 끌어올리는 과정에 참여하게 된다.

‘안장 스툴(Saddled Stool)’

마지막으로 소개할 오브제 ‘안장 스툴’은 비교적 시장성이 있는 디자인으로, 자전거 도난을 방지할 수 있는 가구이기도 하다. 나사로 철재 브래킷을 조여 간단히 스툴의 다리를 연결하고 그 위에 맞춤형 또는 일반 자전거의 안장을 얹은 형태로 제작된다. 자전거 도난을 막기 위해 안장을 분리 보관하는 경우, 안장이 어엿한 의자로 변신하며 사용성이 배가된다.

디자인 유어셀프

프로젝트 ‘농촌 지역의 사물들’은 도시와 농촌 시스템 간의 교류이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사물과 사용자 사이의 대화다. 또한 지금까지 이어져 온 옛 방식들을 보존하면서 새롭게 발전시키기 위한 일종의 모델 프로세스이기도 하다. 전통적 지식과 기술, 실행 방법은 농촌 또는 마을 단위의 생산 구조를 뛰어넘어, 지속가능한 실천으로서 산업 분야에도 적용될 수 있다. 그 과정에서 사용자들이 지속적으로 변화에 관여하고 스스로의 환경에 직접 참여할 수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http://www.gabrielhargrove.com/
originally published by core7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