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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16>상하이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16>상하이 - 천지개벽의 드라마를 쓰다

허정헌기자 xscope@hk.co.kr

상하이를 찾은 관광객들이 황푸강 너머 높이 468m의 둥팡밍주 등 푸둥 지역의 마천루를 감상하고 있다. 푸둥의 스카이라인은 그 자체가 상하이의 상징이다. 
 
장강과 동중국해가 만나는 장강삼각주에 자리잡은 상하이. 세계적으로 가장 급격한 발전을 이룬 도시로 꼽힌다. 최근 20년간 초고층 건물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서며 도시의 모습을 상전벽해시키고 있다. 2001년 이곳을 방문한 김정일 북한 국방위원장은 그 발전상을 보고 "천지개벽"이라며 놀라워했다. 상하이는 겉모습뿐 아니라 경제 규모에 있어서도 이미 아시아의 금융 허브라는 홍콩을 뛰어넘었다. 지난해 상하이의 국내총생산(GDP)은 2,183억 달러로 홍콩(2,107억 달러)을 앞섰다. 세계 금융 허브를 꿈꾸는 상하이의 질주는 현재진행형이다.

상하이가 금융중심지로 발돋움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840년대 영국, 프랑스, 일본 등 제국주의 열강이 중국 진출의 교두보로 삼은 것이 상하이였고, 자연스럽게 무역과 금융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여타 열강이 빠져나간 뒤 영국인이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하는 조계지였던 와이탄(外灘) 지역에는 은행들이 속속 입주, 상하이는 근대 중국의 금융중심으로 발돋움했다.

와이탄에는 영국적 분위기가 짙게 남아있다. 바로크 양식의 대외무역빌딩, 옛 서울시청 건물을 닮은 고전미의 상징인 중국 광대(光大)은행 등 근대 중국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건물들이 길이 1.5㎞인 중산둥이루(中山東一路)를 따라 줄을 잇는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ㆍ개방정책에 따른 세계적 금융도시로서 상하이의 비전을 담아내기에 와이탄은 너무 작았다. 그래서 중국 정부는 1978년 황푸(黃浦)강 건너 푸둥(浦東)으로 눈을 돌렸다. 농촌 지역이었던 푸둥의 화려한 변신이 시작되는 순간이었다. 1990년 푸둥이 외국인투자지역으로 선포된 이후 상하이의 개발은 가속 페달을 밟았다. 1994년 높이 468m의 방송탑 둥팡밍주(東方明珠)가 우뚝 서더니 2009년에는 그보다 24m 높은 상하이 월드 파이낸스센터 빌딩이 들어섰다.

야경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와이탄의 상하이푸둥발전은행 건물. 1923년 유럽 신고전주의 양식으로 지어졌다.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 상하이를 남북으로 가로지르는 황푸강을 유람선을 타고 거슬러 올라가면 왼쪽으로는 와이탄이 간직한 중국 근대의 풍경이, 오른쪽으로는 푸둥이 자랑하는 최첨단 중국 현대의 풍경이 동시에 펼쳐진다. 마치 동시에 100년을 넘나드는 시간여행을 하는 것 같은 상하이만의 특별한 즐거움을 느낄 수 있다. 이는 보호와 개발이라는 두 가지 원칙이 철저하게 지켜졌기 때문이다. 상하이의 스카이라인은 도시를 넘어 중국의 국가 브랜드를 높이는 데도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상하이 도시 개발의 콘셉트는 금융, 무역, 운송, 경제 중심이다. 세계의 돈이 상하이로 흘러 들도록 금융 환경을 조성하면 자금이 필요한 회사들이 모여들고, 이들 회사간 거래가 이뤄지면서 세계 경제의 중심이 된다는 구상이다. 상하이 정부는 최근 유럽과 미국 등 해외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던 MBA 4,000여명을 상하이로 데려와 중국 금융 시스템 등에 대한 교육을 무료로 시켜주는 제도를 실시하고 있다.

발전을 계속 이어나가기 위해서는 전문인력을 끌어들이는 일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자체 금융 인력 양성에도 힘을 쏟고 있다. 중국유럽국제공상학원 MBA 과정은 세계적으로 5위권을 다툰다. 상하이에 진출한 한 미국계 은행 관계자는 "금융 발전을 위해서는 소프트웨어, 특히 인적 인프라가 핵심인데 상하이의 인력 수급은 최고 수준"이라고 평가했다.

이렇게 외국의 우수 인력들이 상하이로 몰려들면서 그들을 위한 주거공간도 발달했다. 특히 푸둥 일대는 고급 주택가로 발전했다. 곳곳에 녹지를 조성해 쾌적한 환경이 조성됐다. 외국인들이 많이 사는 고급 아파트 50평형의 월 임대료는 500만원을 훌쩍 넘고 체감 물가도 서울보다 비싸지만 경제력이 있는 외국인들은 이를 마다하지 않는다. 살기 좋으면 그 정도 비용은 흔쾌히 지불한다는 것이다. KPMG 등 세계적인 컨설팅 회사들은 최근 세계에서 가장 매력적인 도시로 영국 런던에 이어 상하이를 2위로 꼽았다.

하지만 세계를 놀라게 한 상하이 천지개벽의 드라마 뒤에서는 주거환경의 양극화라는 문제도 동시에 나타났다. 황푸강 건너 푸시(浦西) 지역은 인구밀도가 높아 번잡한 대신 집값은 싸고, 푸둥 지역은 인구밀도는 낮지만 집값이 비싸다.

푸둥지역이본격개발되기직전인1990년상하이의 모습. 근대 서양식 건물이 들어찬 사진 아래쪽 와이탄 지역과 달리, 황푸강 위쪽 푸둥지역은 그야말로 허허벌판처럼 보인다.

당연히 중산층 이하는 푸시로, 고소득층은 푸동으로 몰리는 현상이 심화되고 있다. 도시 개발을 둘러싼 분쟁도 골칫거리다. 옛 모습을 보호하려 하는 정부와 당장의 이익을 위해 개발을 원하는 주민들의 의견이 충돌하면서 갈등을 빚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에 따라 상하이 정부는 최근 여론을 최대한 반영함으로써 개발 속도를 조절하는 데 힘을 쏟고 있다. 초고층 빌딩으로 이뤄진 화려한 외형뿐 아니라 시민들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도 비로소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푸둥뿐 아니라 도시 전체에 디자인 개념을 도입하는 것도 상하이의 관심사다. 지난 5월부터 열리고 있는 상하이 엑스포의 주제가 '아름다운 도시, 행복한 생활'이라는 점은 이와 무관하지 않다. 난개발을 막기 위한 노력이 상하이의 지속적 발전을 좌우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견해다.

상하이 예술의 메카 M50


M50의 한 건물 외벽에 그려진 그래피티를 유심히 살펴보고 있는 관광객. 
   
상하이 서북쪽 외곽 보타구에 자리한 모간산루(莫干山路) 50호 지역. 'M50'이라 불리는 이곳은 수도 베이징의 '다산츠(大山子) 798'과 함께 중국의 대표적인 예술단지로 꼽힌다. 두 곳은 공장 건물을 그대로 살려 갤러리로 활용하는 겉모습이나 중국에서 현대 예술의 메카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 그대로 닮았다.

모간산루 일대는 원래 평범한 강기슭 마을이었다가 1930년대 들어서면서 방직공장단지로 탈바꿈했다. 황푸강의 지류인 쑤저우허(蘇州河) 남쪽 강변에 자리잡고 있어 원료를 싣고 와 이곳에서 가공한 뒤 완제품을 실어가기 용이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방직산업이 쇠퇴하면서 1990년대 들어 공장은 하나둘 문을 닫았다.

그렇게 비어가던 공장들은 싼 임대료, 널찍한 공간 덕분에 예술가들에게는 창작공간으로 안성맞춤이었다. 1998년 대만 출신 건축가 덩쿤옌을 시작으로 각 분야의 예술가들이 모여들자 2004년 상하이 시위원회는 이곳을 예술산업지구로 선정했고, 이듬해 모간산루50호라는 정식 명칭을 붙였다.

M50이 예술의 메카로 불리는 이유는 연면적 4만여㎡의 공간에 영국, 프랑스, 이스라엘 등 10여개 국에서 200명에 달하는 예술가들이 들어와 창작은 물론 작품 판매 등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자리잡은 동리갤러리의 줄리 예 관장은 "예술가뿐 아니라 예술을 좋아하는 저변 인구들이 모여들면서 작품에 대한 의견 교환이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다"며 "미국, 유럽에서 작품을 사기 위해 이곳을 찾아오는 외국인들도 많다"고 말했다. 그는 "2008년 미국발 금융위기 때 시장이 잠시 위축되기는 했지만 고가의 좋은 작품들은 별다른 영향을 받지 않았다"면서 "그만큼 M50에는 고정 고객이 있다는 반증"이라고 해석했다.

M50 건물들의 외관은 평범한 공장 같지만 내부에는 갤러리와 예술가들의 창작공간이 자리잡고 있다 

M50 인근에는 한국의 샘터화랑 상하이지점도 자리잡고 있다. 디렉터 장유정씨는 "상하이는 경제적으로 상당히 발전했지만 아직 대부분의 부유층이 명품과 자동차 구매에 관심을 두고 있는 단계"라며 "그 다음에 비로소 미술에 관심을 갖게 되는데, 아마 3년 정도 후면 그 단계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최근에는 상하이 정부의 대대적인 지원으로 티엔즈팡, 하이상하이, X2 창의공간 등 창의예술산업지구가 우후죽순으로 생겨나면서 M50이 위축되지 않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도 나오고있다. M50의 한 관계자는 "상하이 예술문화 전체를 아우르면서 M50의 입지를 확실히 하는 문화발전 계획을 정부가 내놔야 할 시점"이라고 지적하기도 했다.

인터뷰 - 펑시저 푸단대 사회발전ㆍ공공정책대학원장

사진=윤관식기자

"상하이의 발전계획은 끝이 없습니다." 펑시저(彭希哲) 중국 푸단(復旦)대 사회발전ㆍ공공정책대학원 원장은 세계적 금융중심도시로 발돋움하고 있는 상하이의 발전상에 대해 이같이 말했다.

상하이가 현대화를 시작한 것은 덩샤오핑이 1978년 12월 18일 중국공산당 제11기 중앙위원회 3차 전체회의에서 역사적인 개혁ㆍ개방을 선언하면서부터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본격적인 현대화는 1990년 4월 18일 푸둥 개방선언 이후부터였다. 낙후된 마을이었던 푸둥이 마천루가 잇달아 들어서고 800여 개의 금융기관이 입주하는 등 세계적인 도시가 되기까지는 불과 20년밖에 걸리지 않았다. 펑 교수는 "1990년까지는 상하이의 개발 속도가 광저우보다 느렸지만 개방선언 이후 급격히 발전해 현재 상하이 특히 푸둥은 중국 내 가장 현대화된 곳"이라고 설명했다.

펑 교수는 "(한국의 옛 경제개발계획처럼) 상하이 5개년 개발계획이나 10개년 계획 같은 것이 없느냐"는 질문에 "세계의 경제, 정치 환경이 수시로 바뀌는데 발전계획도 그에 맞추어 바뀌어야 하는 것 아니냐"고 되물었다. "발전계획도 생물처럼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것이다. 상하이의 성장 과정은 사실 그의 말을 입증한다. 200년 가까이 외국의 영향을 받았던 아픈 역사를 상하이 사람들은 오히려 발전의 원동력으로 삼았다. 1842년부터 영국은 와이탄 지역에, 프랑스는 황산루에, 일본은 훙커우에 들어와 각국의 문화대로 건물을 지었다. 외국인이 행정자치권이나 치외법권을 가지고 거주하던 조계지의 탄생이다. 펑 교수는 "1920년대 상하이는 도쿄보다 번화한 도시였다"면서 "그 위상을 되찾을 날이 머지않다"고 장담했다.

하지만 급격한 발전 때문에 고민도 많다. 도시 중심부 인구가 증가하면서 교통난과 공해 등 대도시들이 겪는 문제점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펑 교수는 "옛말에 '푸시(황푸강 서쪽지역)에 침대 하나 있는 것이 푸둥에 집 한 채 있는 것보다 낫다'고 했지만, 요즘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말했다. 집값이 그만큼 올랐다는 얘기다. 그는 상하이가 중심부 인구 950만명을 850만명 수준으로 줄여서 좀더 쾌적한 도시환경을 조성하는 계획을 검토 중이라고 소개했다.

"건물과 도로 등 하드웨어뿐 아니라 그 안을 채울 수 있는 문화, 관광 콘텐츠 등이 함께 개발되어야 제대로 된 도시계획"이라는 펑 교수는 "상하이는 이제 진정한 발전으로 가기 위한 갈림길에 서 있는 셈"이라고 말했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10/09/16 13:37:36  수정시간 : 2010/09/30 07:45:5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