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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산업

[월요인터뷰] 알렉산드로 멘디니 "한국 車ㆍ전자제품 디자인 수준 이미 세계정상 올라섰다"

세계 산업디자인계 거장 알렉산드로 멘디니

디자인보다 기능 중요, 못생긴 '프리우스' 잘 팔리는건 탁월한 성능 갖췄기 때문
한국 디자인 장ㆍ단점은 힘 넘치고 기능적인 면 강해, 가구 등 생활 디자인은 아쉬워
 
 

알렉산드로 멘디니는 "디자인은 인간의 삶과 밀접해야 한다" 고 말했다. / 신경훈 기자 nicerpeter@hankyung.com  

170㎝도 안되는 키에 검은색 정장과 안경으로 매무새를 가다듬은 백발의 노신사.세계 산업디자인계의 거장 알레산드로 멘디니(79)의 첫인상은 '마음씨 좋아 보이는 할아버지'였다. 여든 살을 앞둔 나이에도 장난기 가득한 표정에선 '과연 이 사람이 세계 굴지의 기업들이 함께 일하고 싶어하는 디자이너인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자신의 철학과 작품을 소개할 때는 30여년간 세계 산업디자인계를 주도한 디자이너만이 보일 수 있는 '내공'이 고스란히 드러났다.

서울시가 주최한 '2010 서울디자인 한마당'에 참가하기 위해 방한한 멘디니를 지난 17일 잠실 종합운동장 주경기장에서 만났다.

멘디니는 "디자인은 인간의 삶과 밀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일상에서 보는 이의 감성을 풍부하게 만들고 행복을 느끼게 하는 게 디자인이라는 얘기다. 그는 또 "한국의 산업디자인 수준은 전자,자동차 등에선 이미 세계 정상에 올라섰다고 본다"며 "그러나 일상생활 속에서 접하는 디자인은 아직 부족하다"고 말했다.

▼LG전자 롯데카드 차병원(차움) 등 한국기업들과 많은 프로젝트를 진행하는 등 국내에서 인기가 높습니다.

"한국과 인연을 맺은 지 20년이 넘었네요. 한국 사람과 이탈리아 사람 사이엔 '통하는 게'(feeling) 있는 것 같아요. 오랜 역사와 문화를 지닌 점도 비슷하고요. 한국 기업들이 에너지 넘치고,힘있고,열려있는 디자인을 원하는 점도 내 디자인과 맞는 것 같습니다. "

▼한국 기업과 함께한 프로젝트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2000년부터 2005년까지 6년간 한샘이 개최한 국제가구공모전 심사위원을 맡았을 때가 기억에 남습니다. 한국,중국,일본 등 세 나라 디자인을 비교할 좋은 기회였죠."

▼한국의 전자,자동차 산업은 세계적 수준으로 올라섰습니다. 디자인 경쟁력은 어느 정도라고 보십니까.

"이미 세계 정상에 서지 않았을까 싶은데요. 이탈리아가 디자인으로 유명하지만 이탈리아 디자이너가 전자제품을 잘 만들지는 못하지 않습니까. 한국의 자동차만 보더라도 체형과 생활패턴 등 동양적인 특성을 잘 살려 만드는 것 같아요. "

▼전자,자동차를 제외한 다른 분야의 디자인 경쟁력은 어떤가요.

"이탈리아를 비롯한 유럽국가들에 비해 한국은 '일상생활 속 디자인'이 부족합니다. 예를 들어 가구만 보더라도 이탈리아의 디자인은 한국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뛰어나죠.한국에선 하나의 오브제(물건)를 사람에게 필요하게 디자인하는 게 아니라 단순히 기능과 역할만 강조하는 것 같아요. 물론 한 나라가 이것저것 다 잘할 수는 없는 일이겠죠."

▼앞으로도 생활 속 디자인 분야에선 한국이 경쟁력을 갖기 힘들다고 보시나요.

"그건 아닙니다. 밀라노 가구전시회 등에 참가하는 한국 디자이너들을 보면 예전에 비해 훨씬 향상된 모습을 볼 수 있어요. 이탈리아 디자인 경쟁력이 조금씩 낮아지고 있다면 한국의 디자인 수준은 조금씩 올라가고 있다고 할 수 있겠죠."

▼80세를 앞두고서도 왕성하게 활동 중인데, 당신의 대표작을 꼽는다면….

"1978년에 만든 프루스트 의자입니다. 일명 점박이 의자라고 불리죠. 작년엔 한국의 청자를 활용해 프루스트 의자도 만들었습니다. "

▼와인 병따개 안나G도 대중에게 잘 알려진 작품인데요.

"안나G는 원래 어떤 기업 행사에 쓸 기념품으로 만든 것입니다. 원래부터 있던 병따개의 기본 구조를 새롭게 바꿔봤죠.어릴 적에 와인따개를 보면서 마치 팔을 벌리고 있는 발레리나 같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와인을 딸 때 손잡이를 올린 뒤 다시 내리는 게 꼭 춤추는 것 같지 않나요. 그런 연상 이미지를 디자인화한 거죠."

▼궁극적으로 당신이 생각하는 디자인이란 무엇입니까.

"글쎄요. 전 세계엔 약 900만명의 디자이너가 있는데 아마 모두가 '이런 것이 디자인'이라고 다르게 정의 내릴 겁니다. 저도 한 달에 한 번씩 디자인이 무엇인가를 새롭게 정의 내립니다. 그만큼 답하기 힘든 문제죠.한 가지 분명한 건 디자인은 인간의 삶과 밀접하게 연결되어야 한다는 겁니다. "

▼전 세계 산업디자인의 최신 트렌드를 짚어주시죠.

"크게 두 가지 트렌드가 있습니다. 먼저 일상 생활과 관련한 디자인은 모던(modern)해지기보다는 앤틱(antique)한 특성이 더욱 강조되는 것 같습니다. 수공예적 요소를 가미하고 소재도 예전 것이 다시 쓰여진다는 얘기죠.또 다른 트렌드는 휴대폰처럼 기능과 기술을 강조하는 디자인이 빠르게 발달할 것이란 점입니다. 서로 다른 이 두 가지 트렌드를 어떻게 조화시키고 글로벌화하느냐가 앞으로 중요해질 거예요. "

▼그렇다면 내년에 세계를 주도할 산업디자인은 어떤 게 될까요.

"예전엔 디자인 트렌드가 천천히 움직였는데 지금은 매년 새로운 트렌드가 나타납니다. 과거엔 하나의 트렌드가 나오면 적어도 몇 년간은 유지됐는데 이제는 몇 년씩 가는 트렌드는 없어요. 지금 나오는 디자인들을 보면 마치 칵테일 같아요. 여러가지를 한꺼번에 섞어놓은 듯….그리고 그런 트렌드가 전파되는 속도도 인터넷을 통해 더욱 빨라지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예측하기가 힘들어요. "

▼최근 나온 제품 가운데 당신의 눈길을 끄는 게 있나요.

"자고 나면 새로운 기술이 쏟아져 나오는 게 요즘 입니다. 한국의 젊은 디자이너들은 그런 기술적인 요소를 잘 활용하는 것 같습니다. 휴대폰만 하더라도 저에겐 '요술쟁이' 같아요. 옛날엔 한국에서 유럽에 있는 사람과 이야기한다는 건 신이 아닌 이상 아무도 못했던 일인데, 지금은 삼성전자와 같은 기업이 그걸 가능하게 만들었잖아요. "

▼애플 아이폰과 삼성전자 갤럭시S를 비교하면 어떻습니까.

"사실 아이폰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붐을 일으켰죠.그에 비해 삼성 제품에는 새롭다는 느낌이 부족한 것 같아요. (새로운 걸 만들기엔) 이미 덩치가 커져버린 게 아닐까요. 삼성도 이제 '안티 에이징'이 필요해요.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삼성은 휴대폰을 더이상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아이폰과 비교했을 때 삼성 제품의 디자인이 떨어지는 게 아니라 애플리케이션이 떨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그 분야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봅니다. "
▼제조업에 있어서는 디자인보다 기능이 더 중요하다는 말인가요.

"그렇죠.이미 첨단산업 분야에선 형태로서의 디자인은 의미가 없습니다. 예를 들어 도요타의 하이브리드자동차 프리우스는 외형 디자인만 본다면 '못난 차'인데 성능이 좋기 때문에 잘나가고 있는 거죠."

▼적지 않은 나이에도 젊은이 못지않은 창의적인 작품을 만드는 비결은….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요즘 젊은 친구들 중에는 정말 잘하는 친구들이 많고 제가 미처 생각지 못한 것들을 시도하는 친구들도 많아요. 71세인 제 동생만 하더라도 어리기 때문에 이것저것 많이 가지고 다니는데 저는 시계도 없고 휴대폰도 없습니다. "(웃음)

▼디자이너로서 상업성이 너무 강하다는 지적도 있는데요.

"(웃으면서) 아마 내가 프로젝트를 마치고 받는 금액을 안다면 그런 소리는 못할 겁니다. 사실 돈을 벌어도 디자인 관련 리서치를 하는 데 다 쓰기 때문에 많이 벌지는 못합니다. "

▼지금까지 건축 가구 소재 등 여러 분야의 디자인을 해왔는데 앞으로 새로 도전해보고 싶은 분야가 있나요.

"솔직히 더 해보고 싶은 건 없습니다. 다만 지금껏 해왔던 일들을 좀더 잘하고 싶을 뿐이죠.지금도 하나의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늘 부족한 점이 보여요. "

▼한국기업들과 또 다른 프로젝트를 해볼 의향은 없습니까.

"또 다른 프로젝트를 맡는 것보다 제주도에서 15일 정도 휴가를 보내고 싶습니다. 제주도는 정말 환상적이에요. "

이태명/심은지 기자 chihiro@hankyung.com
한국경제 | 입력: 2010-09-19 17:35 / 수정: 2010-09-20 03: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