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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주목 이사람] 공공미술분야 ‘독보적 존재’ 여류작가 안 종 연씨

“내가 만든 조형물은 그 장소를 위한 기도다.”

회화와 조각을 넘나들며 독창적인 작품세계를 구현해온 여류작가 안종연(58)의 작업 철학이다. 그는 순수미술은 물론 공공미술까지 전공한 흔치 않은 작가다. 국내 공공미술 분야에선 단연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최근 그의 작품이 새로 단장한 교보문고 천장을 장식하고, 영월 생태정보단지 입구에 들어서면서 그가 누군가 묻는 이들이 많아졌다.

그는 작품 설치 후 으레 한 달 가까이 산고를 치르듯 몸살에 시달린다. 그만큼 작품에 모든 것을 쏟아붓는다는 얘기다. 푸닥거리를 끝낸 무당의 모습이 아마 그럴 것이다. 영월 작업 후 몸져 누운 그를 양평작업실에서 어렵게 만났다.

 

◇장소성을 가장 중시하는 공공미술로 주목받고 있는 안종연 작가. 그는 자신의 조형물을 특정 장소의 제단에 바치는 제물로 여긴다.

‘누구를 위한 기도가 아닌 어떤 장소를 위한 기도’를 먼저 화제로 삼았다. “깊은 산속 달빛 아래 돌부처처럼 바위에 앉아 명상에 빠져 있는 사람을 생각해 보세요. 산세와 어우러져 평안함이 느껴지지요. 제 작업이 그런 돌부처였으면 해요.”

그의 말에 문득 비보풍수(裨補風水)가 머리를 스쳤다. 장소를 위한 기도가 결국엔 우리 전통 풍수사상에서 나오는 보완풍수가 아닌가. “같은 맥락일 수 있지요. 흔히 비보풍수는 묏자리, 주택, 마을, 도시, 수도 등 인간 삶과 관련된 장소를 정할 때, 그 입지조건이 원하는 만큼 충분치 못할 경우 이를 인위적으로 보완하는 것이니까요.”

가령, 마을 입구나 수구(水口)처가 지나치게 개방되어 마을 내부가 외부에 심하게 노출될 경우 그 경계지점에 숲을 조성한다든가, 마을 뒷산이 제비의 형국인데 앞산이 제비를 위협하는 지네 모양의 산세라면 이를 제어하기 위해 탑을 축조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그렇다고 안 작가가 풍수가라는 얘기는 아니다. “‘장소를 위한 기도’라는 점에서 같은 맥락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흔히 그의 작품을 두고 ‘성찰의 공간’이라 하고 그를 가리켜 ‘노동으로 성찰의 공간을 짓는 수행자’라고도 한다. 스테인리스 스틸, 두랄루민, 유리, 돌 등 무겁고 다루기 까다로운 재료들까지 두루 작품재료로 섭렵하며 치열하게 작업하는 그에 대한 찬사다.

그의 작품은 대부분 혹독하리만치 많은 노동력과 인내의 시간을 요한다. 예를 들어 스테인리스 스틸에 드릴로 수천수만 번의 점을 찍어 내리며 이미지를 만들어 내는 그 인내심은 마치 수행자의 자세와도 같다. 그런 작품 앞에 서면 절로 성찰케 된다.

◇제주 섭지코지 마리오 보타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고 있는 작품 ‘광풍제월(光風祭月)’. 해가 지면 작품과 조명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달무리를 보는 듯하다.
차주용 사진작가

안 작가는 기도처의 촛불 같은 빛에 관심이 많다. 보름달을 바라보고 어머니들이 자식을 위해 빌었던 달빛도 마찬가지다. 영월 생태정보단지 상징조형물 ‘수광영월’도 동강 어라연 계곡을 비추는 달빛 같다. 금속과 유리, LED 전광판, 디지털 비디오 인터페이스가 결합한 하이브리드 작품이다. 한가운데 우주의 순환법칙을 이미지화한 동영상 ‘만화경’이 빛의 파노라마를 연출한다.

제주 섭지코지 ‘휘닉스 아일랜드’에 설치된 그의 작품에서도 이를 엿볼 수 있다. 스위스 출신 현대건축의 거장 마리오 보타가 만든 피라미드형의 클럽하우스 ‘아고라’와 그 안에 설치된 그의 작품 ‘광풍제월’은 건축과 조형물의 조화를 보여주는 백미다. 비바람 그친 뒤 고요해진 밤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을 형상화한 지름 7m, 무게 6.5t의 육중한 대작이 투명한 유리 건물에 매달려 있다. 조형미도 탁월하지만 앞에서 불어든 해풍이 작품을 통과해 건물 위로 불어나가는, 자연공간이 아니면 경험하지 못할 기회를 제공해 공공미술의 진정한 의미를 구현했다는 평가다.

‘빛의 건축가’로 불리는 마리오 보타와의 인연은 어떻게 이뤄진 것일까. “어느날 그로부터 ‘미스터 안에게’로 시작하는 이메일을 받고 한참을 웃었지요. 자신의 건물에 어울리는 작가 작품을 찾다가 저에게 직접 이메일을 보낸 것이에요. 순수하게 작품만 보고 공동작업을 의뢰한 탓에 제가 여자라는 것조차 미처 알지 못했던 모양입니다.”
 

◇영월 동강 어라연 계곡에 설치된 작품 ‘수광영월(水光寧月)’. 밤이면 동강을 둥근 달처럼 비춘다.
차주용 사진작가

그는 제주 바닷가를 거닐며 작품 구상을 구체화했다. “비바람이 그친 뒤 고요해진 밤 하늘에 떠오른 보름달이 어느 순간 퍼뜩 떠올랐어요. 거친 바람을 견뎌낸 뒤 말갛게 다스려진 달처럼 평화를 축원하는 바람을 담아야겠다는 생각을 했지요.”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 작품 ‘광풍제월’이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세상과 모든 이를 위한 기도이기를 바란다.

공공미술은 장소성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그는 제주 동쪽 섭지코지에 온 순간 달을 띄워야겠다는 생각이 섬광처럼 스쳤다. 그 생각은 현실화됐다. 밤이면 작품과 조명이 어우러져 신비로운 달무리를 이루면서 많은 이들이 찾는 관광명소가 됐다.

교보문고에 설치된 작품 ‘좌화취월’은 갖가지 색채와 형태를 가진 유리 구체들이 영롱한 빛을 발산하면서 ‘꽃밭에 앉아 달에 취하듯’ 서점 공간에 판타지를 가미한다. 그것은 일상과 일탈의 경계를 넘나드는 예술소통이다. 궁극엔 책과 어우러진 성찰 공간의 연출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작품 제목에 때론 바이칼 호수 주변 중앙아시아의 영성을 담고 있는 ‘에젠(ezen)’ 개념을 끌어오기도 한다. 그의 작품 철학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섭지코지 설치작품 제목 ‘광풍제월’의 한자도 ‘光風霽月’이 아닌 ‘光風祭月’이다. 인왕제색(仁王霽色)과 같은 ‘갤 제(霽)’자를 쓰지 않고 ‘제례(祭禮)의 제(祭)’자로 고쳐 썼다. “빛과 바람을 모셔두는 제단에 떠오른 달이지요. 피라미드 제단 형상의 마리오 보타 건축에 제의적 서사를 가미해서 건축과 미술의 동행을 모색했습니다.”

안종연 작가는 부산 동아대에서 서양화를 전공하고 뉴욕 스쿨오브 비주얼 아트에서 순수미술(Fine Art)과 공공미술(Public Art)을 공부했다. 1994년 뉴욕 록펠러센터, 1996년 성곡미술관, 2003년 서울시립미술관 등 다수의 기획전에 참여했다. 2006년 부산비엔날레 특별전 등 미술관 전시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활동 중이다.

편완식 기자 wansik@segye.com
<세계일보>입력 2010.09.14 (화) 17: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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