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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이기준의 日常一想 : 나의 모델링 인터페이스 변천사 上

- 이기준의 日常一想 습관이 지속되는 것이 인생이다. 디자이너로서 일상생활을 하면서 나를 둘러싼 주변 세상을 받아들이는 방식을 조금씩 풀어내 보려고 한다. 그것이 곧 가치관이고 스타일이다. 여러분은 어떤 사람인가. 필자는 디자인보다 바흐를 더 사랑하는 프리랜스 그래픽디자이너로 문화와 디자인을 접목한 글쓰기를 즐겨한다.

연습장의 추억

대여섯 살 때쯤입니다. 당시 (그때 명칭으로) 국민학교 다니던 형은 한 페이지가 여섯 칸으로 나뉜 산수 공책을 썼습니다. 필요하면 자를 대고 선을 그어 칸을 더 만들 수 있게끔 칸막이 가장자리엔 일정한 간격으로 점이 찍혀 있었습니다. 그 공책이 어찌나 멋있어 보이던지 부모님에게 사 달라고 졸라서 그림을 그린 것이 제 커리어의 시작입니다. 로봇 따위를 그리곤 했습니다. 국민학교에 들어가면서 종합장이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스케치북이란 것도요. 1학년 때까지만 해도 로봇 그리기 분야에서 저를 따라올 자가 없었는데 2학년에 올라가자 한 녀석이 저보다 더 낫다는 평을 들었습니다. 그 친구의 차별화 전략은 돌려차기 당한 나쁜 로봇의 허리가 끊어지면서 내장 부품이 살짝 삐져나오는 것이었습니다. 그 친구를 이기려면 더 많은 부위가 끊어지고 더 많은 기계부품이 쏟아져 나와야 했습니다. 그날부터 그 친구와 저의 하루는 전날 그린 그림을 책상 위에 펼쳐놓는 것으로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반 아이들이 그 친구 책상에 우르르 몰렸다가 제 책상에 우르르 몰렸다가 하면서 “오늘은 누구 승!” 하는 식으로 판정했습니다. 로봇이 부서지는 모양과 부위를 설정하는 안목이 점점 까다로워지고 부품이 복잡해졌습니다. 로봇의 허벅지 옆 비밀 주머니에 숨겨진 칼도 튀어나오면서 부러지고, 조종석에 앉아 있는 주인공의 헬멧이 깨지면서 이마에서 턱까지 피도 흐르고 말이지요. 그 피가 옷에도 묻고 조종석 계기판에도 튀었습니다. 형이 중학교에 들어가더니 연습장이란 것을 쓰더군요. 플라스틱 링으로 제본한 누런 종이 뭉치였습니다. 그게 또 욕심이 나더군요. 그러니까, 형이 쓰는 물건에 눈독을 들이던 나날이었습니다. 종합장보다 훨씬 두껍고 공책처럼 왼쪽의 긴 면에 제본이 되었다는 점에서 더욱더 전문가의 물건처럼 보였습니다. 만화를 그릴 때 칸의 크기, 비율, 모양을 마음대로 바꿀 수 있었습니다.


<메탈해머>의 충격


80년대 중반에 하드록 밴드 유럽(Europe)의 ‘더 파이널 카운트다운(The Final Countdown)’을 접하면서 제 인생이 새로운 단계에 접어듭니다. 시커먼 가죽옷을 입은 남자들이 가슴팍까지 기른 금발머리를 흔들어대며 들려준 그 폭발적인 사운드!  마이크 스탠드를 빙글빙글 돌리는 묘기도 그때 처음 봤습니다. 아, 기타에서 저런 소리도 나는구나! 저리 가라, 마이클 잭슨. 라이오넬 리치도 안녕. 선희 누나, 미안해요. 일단 고구마를 하나 뽑자 다른 아이들도 줄줄이 뽑혀 나왔습니다. 본 조비(Bon Jovi), 반 헤일런(Van Halen), 억셉트(Accept), 메탈리카(Metallica), 에이씨디씨(AC/DC), 딥 퍼플(Deep Purple), 나이트 레인저(Night Ranger) 등으로 관심의 불이 옮겨 붙었고 그러던 어느 날 <메탈해머(metal hammer)>라는 헤비메탈 전문지를 발견했습니다. 그 순간 저는 디자이너로 다시 태어났습니다. 새 앨범 소개와 기타 광고가 눈길을 끌었습니다. 헤비메탈 밴드의 앨범 표지는 전부 멋있고 화려하고 괴기스러워서 제 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습니다. 다양한 디자인의 기타들은 또 어떻고요. 모든 밴드가 특별한 모양의 마크를 만들어 사용했고 신기의 기타리스트들은 자기만의 독특한 기타 아이덴티티를 가진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 저는 더 이상 로봇을 그리지 않았고 매일 기타를 그리거나 가상의 밴드를 만들어 그 밴드의 로고를 그렸습니다. 1집 앨범부터 유작 앨범까지 디자인했고 그 앨범에 실을 노래 제목도 정했습니다.

바둑판 그리드

정서적 변화를 겪는 시기에 작업 도구에도 큰 변화가 생깁니다. 만년필과 바둑판무늬 공책을 선물 받았거든요. 만년필은 볼펜처럼 똥이 나오지 않아서 좋았지만 연필 같은 농담은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 대신 만년필 특유의 수채화 같은 번짐은 색다른 느낌을 주었습니다. 바둑판무늬 공책은 대칭 형태를 표현하는 데 수월했고 특히 동일한 두께를 지닌 물건을 그리기에 더할 나위 없이 훌륭했습니다. 바둑판 격자 한 칸에 동그라미 사분의 일 호를 그려 넣으면 동일한 크기의 원을 여러 번 반복해서 그릴 수 있었습니다. 동일한 간격으로 겹치기에도 그만이었습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혔습니다. 정각도나 45도 기울어진 물체를 그리기에는 적합했지만 좀 더 자연스러운 느낌을 주기에는 격자가 맞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한 동안 바둑판무늬에 맛을 들였습니다. 그때부터 그리드에 적응하기 시작했는지도 모릅니다. 시각디자인 분야에 종사하기 위한 준비 기간이었는지도 모르겠군요.

페라리의 말, 람보르기니의 소

학교 끝나면 곧바로 음반 매장으로 달려가 아름다운 LP 표지를 구경했습니다. 당시 우리 동네에 있던 음반 매장엔 한쪽 벽에 포스터도 진열해놓고 팔았습니다. 가수들 포스터 사이사이에 스포츠카 포스터도 섞여 있었습니다. 그 포스터들을 들춰보며 집에 가서 그릴 로커들의 헤어스타일이나 의상 콘셉트를 연구하다가 처음으로 페라리(Ferrari), 포르셰(Porsche), 람보르기니(Lamborghini) 등을 봤습니다. 그날 이후 자동차도 레퍼토리에 포함시키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역시 자동차 자체보다는 로고에 더 신경 썼습니다. 페라리와 포르셰 문장엔 말이 있고 람보르기니 문장엔 돌진하는 소가 있습니다. 좋은 자동차의 마크엔 동물이 들어가야 하는구나. 동물의 움직임을 상상으로 그리기는 힘들었습니다. 마크를 그리려고 동물도감까지 샀습니다. 지구의 생태에 눈곱만큼도 관심이 없으면서 말이지요. 동물 그림 위에는 당연히 자동차 이름이 박힙니다. 음악을 들을 때나 자동차를 눈여겨볼 때나 제 관심사는 결국 글자 모양이었습니다. 일렬로 늘어놓는 알파벳에 비해 위아래양옆으로 조합해야 하는 한글을 합리적이지 못하다고 여겼던 당시의 사고관이 기억납니다.

무슨 일엔 이유가 있다

미대 진학을 결심하고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입시미술학원에 다녔습니다. 드라마에서나 보던 장면을 저도 연출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연필을 쥔 손을 쭉 뻗어 한쪽 눈 찡그리고 심각하게 바라보는 그 모습 말이지요. 막상 배우고 나니 허탈한 생각도 들었습니다. 심각해 보이는 분위기와 달리 실제로는 굉장히 원시적인 방식이었습니다. 저 멀리 떨어져 있는 석고상을 눈으로 가늠해 연필을 자로 삼아 손톱으로 대충 표시하는 방법이 뭐랄까, 수학적 진리와 견줄만한 체계적인 테크닉을 기대하고 간 저에겐 뒤통수 얻어맞는 일이었던 셈입니다. ‘모든 일엔 이유가 있다’. 제 기본적인 태도입니다. 아무것도 모르는 내 눈엔 원시적으로 보일지라도 하다 보면 새로운 걸 깨닫게 되리라는 마음으로 일 년 넘게 묵묵히 연필로 석고상의 비례를 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재기를 포기했습니다. ‘이제부터 오로지 눈에만 의지하겠다’. 그게 훨씬 멋있어 보였습니다. 입시를 치를 때쯤엔 눈에 의지하되 간간이 연필로 재는 방식을 섞는 ‘합’의 경지에 도달했습니다. 학교에서 시험을 보면 남는 시간에 시험지에 글자를 디자인하던 저는 대학교에 입학하자마자 한글꼴연구회라는 소모임에 가입했습니다. 글자를 만드는 소모임이라니, 망설일 이유가 없었습니다. 학교 CG실에서 처음으로 매킨토시를 봤습니다. 컴퓨터가 왜 존재해야 하는지 그 이유를 납득하지 못하던 저는 드디어 그 용도를 이해했습니다. 쿼크익스프레스(QuarkXPress)를 사용해 리포트를 쓰면서 점점 컴퓨터라는 도구에 익숙해졌습니다. 제 마음을 사로잡은 소프트웨어는 알트시스(Altsys)에서 나온 폰토그라퍼(Fontographer)였습니다. 글자 만드는 일에 흥미를 느꼈으니 내가 만든 글자를 컴퓨터에 심어 실제로 사용할 수 있다는데 얼마나 신기하고 기뻤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