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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독일 비트라 하우스를 찾아서

장난감 집을 이리저리 포개 놓은 듯 밤이면 UFO 모습 띠는 희한한 전시장
건축과 디자인이 만나는 곳, 독일 비트라 하우스를 찾아서

바일 암 라인(독일)= 김성희 중앙SUNDAY 매거진 유럽통신원 | 제178호 | 20100808 입력  


얼마 전 스위스 바젤 시계 주얼리 전시회를 보러 갔다가 시내에 호텔을 구하지 못해 할 수 없이 국경을 넘어 독일의 작은 마을인 바일 암 라인을 찾았다. 렌터카를 몰고 한적한 국도를 달리는데 갑자기 오른편에 컨테이너를 여럿 포개놓은 듯한 시커멓고 웅장한 건물 하나가 나타났다. 그 옆에는 빌바오의 구겐하임 미술관을 연상시키는 하얗고 구불구불한 건물도 있었다. 도대체 무슨 건물들일까. 시커먼 건물은 1층에 사람들이 앉아 있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레스토랑이나 커피숍이 있는 것 같고 중첩된 집 외관의 창문을 통해 들여다보이는 내부는 디자인 가구를 파는 상점 같기도 했다. 이렇게 오며 가며 일주일을 궁금해 하다가 마지막 날 급기야 차를 돌려 이 신기한 장소를 방문했다. 바로 비트라 하우스(VITRA HAUS·www.vitra.com)였다.

‘건축 박물관’ 비트라 캠퍼스
1950년 설립된 스위스 가구회사 비트라(VITRA)는 1957년 찰스&레이 임스 부부와 조지 넬슨이 디자인한 오피스 가구를 생산하면서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이후 세계적 명성을 지닌 다국적 디자이너들의 창의적인 작품을 디자이너의 이름을 내세우는 방식으로 속속 선보이며 가구 컬렉션과 전시, 출판, 컨템퍼러리 건축에 이르는 하나의 ‘흐름’을 형성했다. 1981년 바일 암 라인에 있는 비트라의 가구 제작 공장에 대형 화재가 발생해 공장 대부분이 전소되면서 ‘비트라 캠퍼스(Vitra Campus)’ 프로젝트는 갑작스레 시동이 걸렸다. 약 24만㎡에 달하는 부지에 명성을 막 쌓기 시작한 건축가들로 하여금 건물을 설계하도록 한 것.


영국 건축가 니컬러스 그림쇼(Nicolas Grimshaw), 포르투갈의 거장 알바로 시자(Alvaro Siza)의 공동 프로젝트로 설계된 이 공간에 프랭크 게리(Frank Gehry)가 유럽에서 첫 번째로 설계한 비트라 뮤지엄이 1989년 문을 열었다. 초기 산업시대의 벤트우드 가구부터 60년대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이탈리아 모던 디자인 등 디자인과 건축에 관한 다양한 전시를 볼 수 있는 이곳은 그 독특한 외관과 함께 곧 세계적인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았다.

또 니컬러스 그림쇼와 알바로 시자 등이 설계한 공장 건물을 비롯해 여성 건축가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설계한 소방서, 재스퍼 모리슨(Jasper Morrison)이 설계한 버스 정류장, 리처드 벅민스터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가 설계한 돔, 안도 다다오의 콘퍼런스 파빌리온, 장 프루베(Jean Prouv<00E9>)의 주유소 등은 이곳을 말 그대로 ‘건축 박물관’으로 부르게 만든다. 카즈요 세지마가 설계한 팩토리 빌딩은 올 하반기 완공된다.

이곳에 지난 2월 비트라 하우스가 문을 열었다. 비트라가 2004년부터 선보인 홈 컬렉션을 소비자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장소다. 설계는 1978년 스위스 바젤에서 활동을 시작한 헤르초크 앤드 드 뫼롱(Herzog & de Meuron)이 맡았다. 런던 테이트모던 미술관과 새 둥지 모양의 2008 베이징 올림픽 주경기장 설계로 세계 최고의 명성을 누리고 있는 이들이다.

통유리 벽을 통해 보이는 외경, 보여주는 내부
최고 길이 57m, 너비 54m, 높이 21.3m의 비트라 하우스는 마치 거인 나라의 어린아이가 12개의 긴 장난감 집을 아무렇게 끼워 맞추며 5층으로 쌓아 올린 듯한 기발한 형태가 돋보이는 쇼룸이다. 건물 한쪽만 고정되고 다른 한쪽은 공중에 붕 떠 있는 캔틸레버(Cantilever-외팔보) 공법으로 지어졌다. 시골 전원 풍경에 걸맞지 않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색감이라 낮에도 눈에 확 띄지만, 밤이 되면 사방으로 난 각 집의 전면 유리창을 통해 나오는 불빛이 마치 외계인이 타고 온 UFO처럼 보이게 한다.

입구는 이 겹쳐진 집들의 중앙에 위치해 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전 밑에서 포개진 집들을 올려다볼 수 있게 설계됐다. 아직 실내로 입장하지도 않았지만 꼭 실내에 들어온 것 같은 아늑한 분위기의 넒은 공간이다. 혹시라도 이 집들이 무너져 내리지 않을까 하는 걱정도 잠깐 들었다. 1층에는 디자인숍과 커피숍이 있고 안내데스크 옆에는 비트라 캠퍼스를 한눈에 볼 수 있는 조감도가 자세한 설명과 함께 그려져 있었다. 안내데스크 직원으로부터 받은 까마귀가 그려진 카드를 들고 5층 꼭대기로 올라갔다. 각 층은 스타일에 맞는 가구들로 구성되었는데 방문객들은 의자나 소파에 직접 앉아보기도 하고 가구를 사용해볼 수 있었다. 전면 유리창 밖에 있는 셰즈 롱(긴 의자)에 누워 바젤의 스카이 라인을 구경할 수도 있고 스크린이 삽입된 칠판 벽에 낙서를 할 수도 있었다.


찰스&레이 임스 부부, 조지 넬슨, 장 푸르베, 베르너 팬톤 등 중견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클래식 제품과 로낭&에르완 부홀렉, 안토니오 시테리오, 재스퍼 모리슨 등 현대적인 디자이너들이 디자인한 제품을 볼 수 있다. 20세기 의자 디자인을 한눈에 볼 수 있는 1층의 비트라 비트린(Vitrine) 은 마치 포개진 집들의 무게에 눌려 찌그러진 것 같은 형상을 하고 있다. 층과 층을 연결하는 계단은 나선형으로 되어 있다. 계단 사이로 아래층이 살짝 보였는데 마치 롤러코스터를 타고 위아래를 다니는 느낌이다. 그들은 스스로 이 계단을 “지렁이가 갉아먹는 듯한 계단”이라고 표현했다고 하니 그 상상력 한 번 근사하다.

무엇보다 흥미로웠던 것은 카탈로그의 역할을 하는 컴퓨터 스크린이다. 가구들이 위치한 곳에는 항상 지휘자의 악보대 같이 생긴 컴퓨터 스크린이 있고 입구에서 받은 까마귀 그림이 그려진 카드를 집어넣으면 가구의 이름과 재질, 가격, 그리고 방문객이 사는 나라, 혹은 도시의 매장 위치를 친절하고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소파에 앉아 사진을 찍고 카드에 저장한 후 내 e-메일로 이미지를 전송할 수도 있었으며 가구를 직접 주문할 수도 있었다. 오픈된 사무실 벽에는 가구에 사용된 재료와 색상이 모두 전시되어 있었고 방문객들은 그곳에서 직접 원하는 디자인과 색상을 선택할 수 있다.
디자인과 건축의 절묘한 결합은 이렇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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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밀라노를 무대로 활약 중인 보석디자이너. 유럽을 돌며 각종 공연과 전시를 보는 게 취미이자 특기. 『더 주얼』(2009) 등을 썼다. sunghee@stella- b.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