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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산업

볼펜에 스포츠카를 담아라

[매거진 esc] 3년 개발 끝에 새로운 볼펜 ‘FX ZETA’ 내놓는 모나미 디자인팀 
 

» 모나미 디자인팀의 이덕영 대리(왼쪽)와 류재준 과장.

엄지, 검지, 중지 세 손가락만 있으면 볼은 굴러간다. 굴러가는 볼의 궤적을 따라가는 잉크의 흔적이 글씨다. 손가락으로 두드리면 글씨를 쓸 수 있는 시대에 살고 있어도, 세 손가락 끝을 모으고 손목을 움직여 만들어내는 글씨의 힘은 여전하다. 글씨를 쓸 수 있도록 인간이 만들어낸 필기도구 중에 가장 편리한 도구는 볼펜이다. 잉크에 따로 찍을 필요도 없고 계속 깎아낼 필요도 없다.

‘볼펜’이라는 단어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머릿속에 그려지는 하나의 형태가 있다. 육각형으로 만들어진 흰색 플라스틱 막대기 양쪽에 같은 색깔의 촉 덮개와 노크가 있는 모나미 153 볼펜이다. 1963년 5월1일 시장에 나와 지금도 사용되는 모나미 153 볼펜은 대한민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살면서 한번쯤은 잡아보게 되는, 또 누구나 살면서 153 볼펜에 얽힌 이야깃거리 한두가지쯤 갖게 되는 볼펜의 원형이나 다름없다. 디자인에서는 한국적 ‘슈퍼 노멀’ 디자인의 대표적인 제품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최소한의 디자인만으로 최대의 효과를 거둬냈다.    
 
» (위) 영화 <아이언맨>에 나왔던 아우디의 ‘아르8’. 에프엑스 제타 디자인의 참고 자료가 됐다.
(아래) 영화 <아이로봇>의 한 장면. 영화 속 로봇의 팔 부분 역시 참고 자료 역할을 톡톡히 했다. 
 
153 볼펜으로 47년이 넘게 ‘국민 볼펜’의 자리를 지켜온 모나미가 이번달 또 하나의 새로운 볼펜을 내놓는다. 이 볼펜의 이름은 ‘에프엑스 제타’(FX ZETA). 직선과 곡선이 자연스럽게 교차하는 이 볼펜이 나오기까지 걸린 시간은 3년. 보통 볼펜 하나의 제작 기간은 6개월에서 길어야 1년이다. 에프엑스 제타는 보통 제작 기간의 3배가 넘는 시간이 걸렸다. 그만큼 공을 들였다는 얘기다. 그 3년 동안의 이야기를 듣기 위해 모나미 디자인팀을 만났다.

10명으로 이뤄진 모나미 디자인팀은 크게 제품 디자인 담당과 시각 디자인 담당으로 나누어진다. 제품 디자이너들은 모나미가 출시하는 문구류 제품의 디자인을 그려내고, 시각 디자이너들은 그 제품에 덧입혀지거나 그 제품 주변의 모든 시각적 이미지를 만들어낸다. 그렇게 서로 다른 분야의 디자이너들이 머리를 맞대 하나의 제품을 완성해나간다. 에프엑스 제타뿐 아니라 모나미의 수많은 사무용품을 만드는 데 제품 디자이너인 류재준 과장과 시각 디자이너인 이덕영 대리의 손발이 맞는 건 그래서 중요하다.

“동시에 2~3개의 제품 디자인을 진행하기도 해요. 그렇다고 다 실제 제품으로 만들어지는 건 아니에요. 소비자 조사를 통해 좋은 반응을 얻은 제품이 출시되죠. 특히 모나미의 경우 누구나 편하게 사용할 수 있는 범용 제품이 될 수 있는지가 중요해요. 디자인 문구와는 다르게 기술적인 부분도 중요하죠. 그래도 최근 경향을 보면 확실히 디자인 면에서는 사람들의 눈높이가 많이 높아진 걸 알 수 있어요. 최대한 세련된 제품을 디자인하려고 노력하죠.”

올해로 창립 50돌을 맞은 모나미한테는, 또 모나미 문구류의 중추 구실을 하는 디자인팀에는 풀어야 할 숙제가 있다. 153 볼펜 이후 그만한 히트작을 내놓는 것, 또 하나는 밀려드는 외국 제품 사이에서 모나미만의 정체성을 만들어내는 것, 두 가지다. 이 숙제가 해결되기를 바라면서 내놓은 제품이 에프엑스 제타다.

이 제품의 시작은 잉크였다. 기술로 승부하겠다는 결심을 한 모나미는 3년 전 새로운 잉크인 ‘에프5’(F5) 개발에 성공했다. 특수 유성잉크인 에프5는 기존의 잉크보다 부드럽고 선명하면서 날렵하고 속도감이 있다. 중성펜에 비해 잉크 찌꺼기도 현저히 줄어들었고, 0.7의 볼을 탑재해 오랜 시간 사용해도 피로하지 않도록 했다. 잉크의 특징에 대한 정보는 고스란히 디자인팀으로 넘어왔고, 그때부터 디자인팀은 잉크의 특징을 담은 볼펜의 외형 작업을 시작했다. 

» 볼펜에 스포츠카를 담아라 
  
“가장 먼저 떠오른 건 스포츠카였어요. 디자인을 시작하던 2008년에 <아이언맨>이라는 영화가 개봉했는데, 영화 속에서 아이언맨인 로버트 다우니 주니어가 ‘아우디’의 ‘아르8’(R8) 모델의 스포츠카를 타고 나와요. 부드러우면서도 날렵한 그 차의 형태에서 볼펜 디자인의 모티브를 따왔죠. 윌 스미스 주연의 <아이로봇>에서도 힌트를 얻었어요. 영화 속 로봇의 팔 부분에서 나타난 기계적인 골격의 느낌을 넣어봤죠. 그렇게 새로운 볼펜의 특징을 디자인으로 잡아가는 과정을 시작했어요. 스포츠카의 브레이크 등처럼 볼펜 뒷부분에 빨간색을 넣어보기도 했고, 골격이 다 보이도록 투명하게 만들어보기도 했죠.”

제품 디자이너들이 주목한 또 한가지는 손에 쥐고 쓸 때의 밀착감이다. 속도감이 있는 잉크이기 때문에 손에 잘 쥐어지지 않으면 잉크 속도를 손이 따라가지 못하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도 있었다. 그래서 에프엑스 제타는 볼펜 아래쪽은 둥글게, 엄지와 검지 사이에 걸쳐지는 볼펜 중간부터 위쪽은 부드러운 사각형으로 제작돼 손 안쪽에서 헛돌지 않도록 했다. 류 과장은 “펜은 손의 일부이자 연장이기 때문에 그만큼 자기 손처럼 편하게 사용하는 게 중요하다”며 “에프엑스 제타의 디자인 작업에서 누가 사용해도 편리한 보편적 디자인의 가치인 ‘유니버설 디자인’ 측면도 신경을 썼다”고 설명했다. 점차 형태를 갖춰가기 시작한 볼펜은 여러 차례의 소비자 설문조사와 반응 등을 통한 수정을 거치며 지금의 디자인으로 완성됐다. 
 

» 지난해 세계적인 디자인상 레드닷어워드에서 상을 받은 모나미의 산업용 매직펜 ‘마커스 프로유성매직’(위). 30억개가 넘게 팔린 모나미 ‘153 볼펜’(아래). 
   
에프엑스 제타 볼펜은 기본형 외에도 기본 디자인을 다양한 형태로 응용한 고급형 볼펜과 멀티펜 등 여타 애플리케이션 제품이 함께 출시된다. 3년이라는 시간이 걸린 데에는 애플리케이션 제작도 한몫했다. 에프엑스 제타는 볼펜 한 자루의 이름일 뿐 아니라 하나의 디자인을 공유하는 다양한 제품의 브랜드 이름이기도 하다.

디자인팀 시각 디자이너들은 볼펜의 이미지를 함축적으로 보여주는 로고 제작부터 스티커, 인쇄물 등 에프엑스 제타의 시각적인 이미지를 맡았다. 에프엑스 제타의 브랜드 이미지를 만들어나가면서 동시에 모나미라는 거대한 브랜드 정체성에 대한 고민도 계속해나갔다고 한다.

“문구류 디자인은 크게 두 개의 서로 다른 시장이 주도해요. 하나는 다양한 색상과 깔끔한 디자인, 작은 기능의 극대화 등이 특징인 일본 시장이고, 다른 하나는 단순한 디자인을 뚝심 있게 밀고 나가며 정밀성을 높여가는 독일 시장이죠. 일본과 독일 시장의 브랜드와 제품이 국내 시장에도 많이 들어오면서 모나미만의 브랜드 정체성을 갖는 게 그 어느 때보다도 중요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저희는 지금까지 제품 각각의 개성을 살린 이미지를 만드는 데에서 회사 전반의 브랜드 정체성을 만드는, 사람 냄새 나는 브랜드 정체성을 이미지화하는 데 골몰하고 있죠.”

이렇게 고민에 고민을 거듭해 만들어낸 에프엑스 제타는 이제 곧 시장에 풀린다. 출시 전 소비자 조사에서 반응이 어땠냐고 물으니 “좋다와 별로다, 반반이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에프엑스 제타가 ‘오래된 친구’인 153 볼펜만큼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까? 인터뷰를 진행하는 한 시간여 동안 써본 결과, ‘꽤 괜찮은 친구’라는 데 한 표 던지겠다.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 사진 제공 모나미 
 
기사등록 : 2010-08-11 오후 06:42:23  기사수정 : 2010-08-11 오후 07:08: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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