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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훈의 오판 … 네이밍 싸움에서 졌다

투표함도 못 연 주민투표

오세훈 서울시장이 24일 오후 서울시청 선거상황실에서 투표 결과에 대한 입장 발표에 앞서 인사하고 있다. [김태성 기자]

주민투표의 승패는 ‘네이밍’(작명)에서도 갈렸다. 오세훈 서울시장의 ‘단계적 무상급식’이란 구호보다는 민주당의 ‘나쁜 투표, 착한 거부’란 슬로건(사진)이 이번 주민투표에서 더 먹혀들었다는 것이다.

민주당은 주민투표를 앞두고 일찌감치 “아이들 편가르는 ‘나쁜 투표’ 거부하자”라는 플래카드를 지하철역에 내걸었다. ‘나쁘다’ ‘착하다’는 감성적이면서 이분법적인 접근을 통해 누구나 어렵지 않게 자신들의 논리를 전파한 것이다.

민주당 관계자는 “‘나쁜 투표 거부’는 의도적으로 만든 것이 아니라 네티즌들 사이에서 자연스럽게 만들어진 단어”라고 설명했다.

한나라당은 야당 시절만 해도 종합부동산세 등을 ‘세금폭탄’으로, 대북 지원에 대해 ‘퍼주기’란 말로 당시 여당인 열린우리당을 곤혹스럽게 했다. 당시엔 작명 싸움에서 우세를 보였으나 이명박 정부 들어선 상황이 역전됐다.

민주당은 ‘나쁜 투표’ 외에도 ‘강부자·고소영 내각’(강남부자·고려대·소망교회·영남내각), ‘미친 소’(미국산 쇠고기) 등의 작명으로 재미를 봤다.

민주당의 ‘부자 감세’와 ‘반값 등록금’이란 용어는 결국 한나라당에서도 쓰이는 단어가 됐다. 한나라당 배은희 의원은 “‘나쁜 투표’라는 표현으로 일단 성공하긴 했지만 사안의 본질을 흐린다는 측면에서 결코 바람직한 용어가 아니었다”고 말했다.

오세훈 시장은 오판도 했다. 그는 애초에 자신의 ‘단계적 무상급식안’이 야권이 주장하는 ‘전면적 무상급식안’보다 설득력이 있다고 자신했다. 그래서 야권과 승부가 벌어지면 판은 뜨거워지고, 결국 승리할 수 있다고 봤다. 하지만 이게 착각이었다. 민주당과 서울시교육청 등이 아예 투표 불참운동을 할지는 예상하지 못했다. 투표 불참으로 유효 투표율 33.3%에 이르지 못해 투표함도 못 여는 상황을 간과한 게 패착이었다.

그는 뒤늦게 주민투표에 대한 시민들의 집중도를 끌어올리기 위해 두 번에 걸쳐 대선 불출마와 시장직 사퇴 카드를 던졌다. 특히 “시장직을 걸겠다”고 했을 땐 눈물을 흘리고 무릎까지 꿇은 채 시민들에게 투표 참여를 호소했다. 하지만 민심은 끝내 그를 외면했고 정치생명을 건 승부수는 불발에 그쳤다. 이젠 언제 사퇴할 것이냐를 정해야 하는 결단만 남았다.

24일 오후 8시30분 서울시청 대회의실. 오세훈 서울시장이 취재진의 카메라 플래시 세례를 받으며 들어섰다. 무상급식 주민투표가 투표율 미달로 개표가 무산된 직후였다. 오 시장은 양복 상의 안쪽 주머니에서 A4용지 한 장을 꺼내 담담한 목소리로 발표문을 읽어 내려갔다.

“미래 우리나라의 바람직한 복지정책 방향을 확인할 수 있는 단 한번의 기회를 놓치게 돼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시민들의 소중한 뜻이 담긴 투표함을 개봉조차 못해 참으로 안타깝습니다. 저는 투표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투표에 당당히 참여해 준 시민 여러분께 고개 숙여 감사드립니다.”

오 시장의 성명은 짧았다. 지난 21일 “유효 투표율 33.3%를 넘지 못할 경우 시장직을 사퇴하겠다”고 했던 그였지만, 이날 기자회견에선 취재진의 질문도 받지 않은 채 회견장을 나갔다. 입장부터 퇴장까지 채 5분이 걸리지 않았다. 대신 마이크를 받은 서울시 이종현 대변인은 “시장직 사퇴 문제는 엄중한 사안인 만큼 1~2일 사이에 입장을 정리해 다시 발표하도록 하겠다”고 말했다.

글=양원보·강기헌 기자
사진=김태성 기자

강기헌 기자 [emckk@joongang.co.kr] 기자
김태성 기자 [tskim@joongang.co.kr] 기자

[중앙일보] 입력 2011.08.25 02:02 / 수정 2011.08.25 0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