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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정호진의 예술과 디자인의 경계에 서서] 〈17〉 키치, 거대한 메릴린, 미술 시장

욕망의 대상 상품화… 저속한 키치인가 아트 비즈니스인가

미국 시카고에 26피트(약 8m)에 달하는 압도적인 크기의 메릴린 먼로가 영화 ‘7년 만의 외출’에서 선보였던 그녀만의 상징적인 몸짓으로 치마를 펄럭거리며 들어섰다. 관광객이 몰려들어 치마 아래에 카메라를 들이대고 줄을 서서 그녀의 다리를 어루만지는 모습이 장관(?)이다. 이 조형물은 공식적으로 공개되기 전부터 ‘선정적’이고 ‘성차별적’인 조형물이라는 공격을 받으며 시선을 끌었다. 문제작은 슈워드 존슨 Jr의 ‘포레버 메릴린’이다.

사실 파이어니어 코트에 존슨의 작품이 들어선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다. 광장의 소유주이며 이 전시를 후원하는 젤러 리얼티 그룹은 존슨의 또 다른 작품 ‘갓 블레스 아메리카’를 2008년부터 2010년 초까지 전시했고, 그 이전에는 ‘리어 왕’을 그 자리에 세웠다. 존슨은 그 외에도 ‘종전의 키스’ 혹은 ‘승리의 키스’로 불리는 유명한 사진에 나오는 해병과 간호사처럼 사람들의 기억 속에 있는 유명한 이미지를 그대로 재현해 내거나 사진을 찍고 있는 남자, 뛰어 노는 아이들, 벤치에서 신문을 읽고 있는 사람 등 일상생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을 본뜬 조형물을 제작해 도시 곳곳에 설치하며 인기를 높였다. 당연히 그의 작품은 미술계 안팎에서 논란을 몰고 다녔다.

 
‘포레버 메릴린’(슈워드 존슨 Jr 작, 2011년 설치, 26피트).
LA 타임의 크리스토퍼 나이트는 “설마 슈워드 존슨이 미국 최악의 작가가 되려고 하는 것이냐”고 비아냥댔고, 패디 존슨은 시카고 트리뷴에 “형편없는 공공미술이 시카고에서 청중을 찾다”는 글을 기고했다. 호주 출신 비평가 로버트 휴스는 존슨의 작업을 “싸구려 초콜릿 상자”라고 부르며 “그의 작품에서는 어떠한 창의적인 요소도 찾을 수 없고, 모텔이나 쇼핑 몰을 운영하는 사람들이나 가지고 있을 법한 유치한 기업 마인드에 어필하는 것들만 가득할 뿐”이라고 했다.

‘갓 블레스 아메리카’(슈워드 존슨 Jr 작, 2008년 설치, 25피트). 미국 지역주의 운동의 선구자 그랜트 우드의 대표작인 ‘아메리칸 고딕’을 그대로 본떠 만든 입체 작품으로 원작은 시카고의 아트 인스티튜트 뮤지엄에 소장됐다.
존슨은 작품 세계를 “누구나 사랑하는 친숙한 이미지에 영원한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라고 설명하며 대중적 인기에서 큰 힘을 찾아내고 있다. 그는 인상주의 예술가들이 활동 초기에 미치광이 취급을 받고, ‘프랑스의 명예를 더럽히는 자들’이라고 손가락질 받았지만 지금은 위치가 전복된 사실과 자신의 상황을 극적으로 연결하려는 듯 모네, 마네, 고흐 등의 인상주의 작품의 장면을 실제 크기 조각으로 끊임없이 찍어내 뉴저지의 조각공원 가득 채워 놓았다.

로버트 휴스는 제프 쿤스의 작품에도 독설에 가까운 비평을 퍼붓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데 “두 작가를 비교하는 것은 개의 배설물이냐, 고양이의 배설물이냐를 따지는 것과 같다”며 거친 표현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언뜻 보기에 존슨과 쿤스 사이에는 공통점이 무척이나 많아 보인다. 쿤스 역시 선물포장, 자기인형, 장난감 같은 일상적인 소재를 작품에 전적으로 수용해 일반적이지 않은 비범한 규모와 재료마감 등으로 평범한 오브제를 특별한 ‘작품’으로 탈바꿈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얼마 전 신세계 백화점에서 거액에 구입해 대대적인 마케팅을 벌인 제프 쿤스의 작품 “세이크리드 하트”는 휴스가 존스의 작품을 폄하할 때 표현한 바로 그 초콜릿 포장의 아름답고 당당한 버전이다.

친숙한 오브제로 보는 사람의 관심을 자극하고 동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이 가지고 있는 유대감에 호소하는 싸구려 ‘키치’라는 비판에 존슨은 “제 작품을 좋아하는 사람의 대부분은 자신의 미적 감성을 표현하는 데 소심한 사람들입니다. 제가 정말 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의 감성을 밖으로 끌어내 주는 것이에요. 그들도 내면에는 정말 강한 감정이 있거든요. 단지 그동안 예술 세계 주류의 위협에 눌려 감춰져 있었을 뿐이죠”라고 대답한다.

세이크리드 하트’(1994∼2007년 작, 제프 쿤스, 스테인레스 스틸).
다국적 제약회사 존슨 앤 존슨의 창업자의 손자인 슈워드 존슨 Jr는 거의 우연히 예술가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는 조각 작품을 제작하는 데 가장 큰 어려움인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존슨 아틀리에’를 만들었고 작품의 유통을 돕기 위해 비영리 ‘조각 재단(The Sculpture Foundation)’을 설립했다. 이 재단은 존슨의 작품이 찬반논쟁에 휩싸일 때마다 “공공미술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역 주민과 대화를 시작하는 데에 있다”는 점을 강조하며 미적 접근을 교묘히 피했다.

저작권 재판으로 악명이 높은 제프 쿤스 못지않게 존슨 역시 관련 재판에 많이 말려들었는데 그는 이에 대해 “어리석은 규칙”이지만 “변호사의 조언대로 저작권을 침해하지 않는 정도까지만 디테일을 조정하여 작품을 제작하는 선에서 타협”한다고 대답한 바 있다.

존슨이 예술계 주류 밖에 있는 대중의 취향에 맞춰 작품을 생산하는 작가라면 쿤스는 자신의 예술관뿐 아니라 그 자신의 존재 자체를 나르시스트적으로 숭배하며 현대 미술의 흐름을 자신을 중심으로 바꿔 주목을 받은 작가이다. 쿤스의 작품에 비판적인 의견을 퍼붓는 비평가라도 현대미술에서 쿤스를 빼놓을 수 없다는 점에는 하나같이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시장이 미술 시스템에서 큰 역할을 차지하는 현 상황에서, 로버트 휴스의 말처럼 “쿤스는 시장이 거의 모든 것을 컨트롤하는 미술 시스템이 만든 완벽한 생산품 같은 존재”이다.

1980년대에는 BBC에서 ‘새로운 것의 충격’이라는 인기 프로그램을 제작해 모던 아트의 길잡이 역할을 하기도 했던 그는 “미술 시장 시스템에서 예술가와 딜러들이 저작권법을 통해 그들의 작품에 대해 쓰이고 방송되는 내용을 컨트롤하는 방법을 찾아낸다는 점”을 무척이나 흥미롭게 생각했다. 그는 또한 유명 예술가들은 비평의 성역에 들어갔다고 지적했다. 그의 요청에 데미언 허스트의 갤러리는 “데미언이 비평에는 지나치게 민감”하기 때문에 프로그램과의 인터뷰를 거절했고 멜 보크너는 촬영이 모두 끝난 후 방영 광고를 며칠 앞두고 딜러를 통해 출연 거부를 일방적으로 통보했다.

‘세례자 성 요한’(1988년 작, 제프 쿤스, 도자 세라믹).
쿤스는 작품을 소비하는 대상인 대중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집중적으로 연구한 작가이다. 그는 실험적이거나, 전위적인 작품부터 제목 이상의 전달할 거리가 없어 보이긴 하지만 현존하는 최고의 기술로 제작해 보는 이를 압도하는 작품까지 다양하게 섭렵해 모든 취향을 만족시키는 듯한 작품세계를 만들어내었다.

휴스는 쿤스가 자신을 미켈란젤로라고 믿고 뻔뻔스럽게 떠벌린다는 사실보다 그 말을 믿는 컬렉터들이 존재한다는 점이 더 문제라고 했다. 그는 “파르미자니노가 무슨 치즈의 이름인 줄 아는 컬렉터들”이 플로리다의 늪지대를 팔아 번 돈으로 쿤스의 ‘세례자 요한’ 같은 끔찍한 조각을 지원해 준다고 비판했다(흔히 파마산 치즈라고 부르는 이탈리아 치즈는 파르미자노(레자노)이며 ‘파르마 지역의’라는 뜻이다.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화가 지롤라모 프란체스코 마리아 마촐라는 파르마 출신의 작은 사람이라는 뜻인 파르미자니노라는 별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스튜어트 플래트너는 ‘가장 기묘한 역설-현대 미술 시장’이라는 책에서 리틀 존의 글을 인용하며 쓴 대로 “의도적으로 바보처럼 기괴하게 만든 것” 같은 작품을 엄청난 돈을 주고 소장하는 대형 컬렉터들이 있다는 상황이 참담하지만 “만약 당신에게 그 작품이 소유하고 싶은 느낌을 주고 깊은 공감대를 느끼해 해준다고 하면, 나는 내 의견이 더 값어치 있다고 당신을 설득할 어떤 방법도 갖고 있지 않다”고 썼다.

이제 예술은 무엇이든 거리낌없이 비즈니스 상품으로 만들어버린다. 예술이 ‘쇼 비즈니스’로 전락했다는 휴즈의 표현에 완전히 동의하지 않더라도 시장의 흐름에 예술은 어느 때보다 민감하다. 그러한 변화를 누구보다 잘 내다본 제프 쿤스는 단호하게 자신이야말로 20세기를 대표하는 작가라고 스스럼없이 PR한다. 뿐만 아니라 자신은 소통의 중심에서 예술계를 이끄는 엄청난 책임감이 뒤따르는 자리에 서 있고 그 자리에 있기를 누구보다 절실히 원했기에 그 자리에 설 자격이 있다고 말한다. 그 자리를 탐내는 다른 이들은 그들이 원하는 것을 던져줘 봐야 감당하지 못하고 도망쳐버릴 것이 뻔하지만 자신은 매우 뛰어나고 강한 예술가로서 20세기를 이끈 작가 중에는 피카소와 뒤샹만이 자신에 견줄 있을 거라고 주장한다. 그의 맹목적이고 비논리적이지만 단호한 그의 모습은 종교적 분위기의 독재자의 연설과 닮았다. 휴스는 시장과 예술의 관계는 싫든 좋든 앞으로도 한동안 이어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크고 작은 욕망의 대상을 상품화한 작가답게 쿤스는 우리의 귀에 달콤하게 속삭인다. “느낌대로 믿고 따르세요. (…) 그럼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어요. 제가 바로 좋은 예가 아니겠어요? 제가 할 수 있었다면, 당연히 여러분도 할 수 있어요.”

그는 누구나 가질 수 있지만 가지지 못하는 고가의 아이템을 우리들 눈앞에 흔들고 있다. 손을 뻗어 쥐는 순간 눈부시게 번쩍거리던 거대한 스테인리스스틸 장식은 마법이 풀리며 싸구려 초콜릿에 달린 조악한 리본으로 탈바꿈할지도 모른다.

조각·미술설치가(밀라노) hojin00@gmail.com

<세계일보>입력 2011.07.24 (일) 16:4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