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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환경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0> 나오시마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20> 나오시마 -현대미술 천국이 된 섬마을
땅 속 전시장, 해변 위 작품… 풍경·예술 '환상 궁합'

나오시마= 글ㆍ사진 이왕구기자 fab4@hk.co.kr  
김지원기자 eddie@hk.co.kr
사진 배우한기자 bwh3140@hk.co.kr 

나오시마를 찾은 관광객들이 미야노우라항 부둣가에 설치된 쿠사마 야요이의 설치미술작품‘빨간 호박’을 배경으로 기념사진을 찍고 있다. 나오시마에는 창의적인 설치미술작품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다. 

일본 시코쿠의 중심지인 가가와현 다카마쓰항에서 북쪽으로 13km 가량 떨어진 섬 나오시마(直島). 나오시마행 페리에 몸을 실은 지난 10일, 400명 정원의 여객선은 갑판까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올망졸망한 섬들과 푸른 바다의 조화가 빚어내는 세토 내해의 절경은 '아시아의 지중해'라는 일본인들의 자랑이 과장으로 느껴지지 않을 정도였다. 1시간 남짓 항해 끝에 나오시마 미야노우라항 부둣가에 설치돼 있는 일본의 세계적인 미술가 쿠사마 야요이의 설치작품 '빨간 호박'이 눈에 들어오자 배 안에서는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탄성이 터져나왔다.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 설계로
地中미술관·이우환 미술관 등 건립
잭슨 폴록 등 거장들 작품으로 채워

1년에 섬인구 100배 넘는 관광객 발길
죽어가던 이웃 섬에도 활기 불어넣어

풍경과 예술이 하나로

나오시마의 랜드마크가 된 '빨간 호박' 앞에서 기념사진 한 장을 찍을 여유도 없이 지추(地中) 미술관과 베네세하우스 미술관, 한국인 작가 이우환의 작품으로 꾸며진 이우환 미술관, 빈 집을 설치미술공간으로 활용한 이에(家) 프로젝트 지역으로 이어지는 나오시마 순례는 숨가쁘게 진행됐다.

처음 도착한 곳은 섬 남쪽 야트막한 구릉에 위치한 지추 미술관. 현대미술에 관심이 있어 나오시마를 찾은 사람이건, 단순한 관광객으로 이곳을 찾은 사람이건 입구에 당도한 이들은 우선 이 미술관 자체에 압도당한다. 산 능선을 보존하려는 목적으로 설계돼 이름 그대로 미술관은 땅 속에(地中) 묻혀져 있다.

건축가 안도 다다오의 트레이드 마크인 노출 콘크리트, 입구에서 전시실로 이어지는 미로 같은 동선 등은 작품을 만나기 전부터 방문객들에게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이 미술관에 전시된 작품은 단 9점. 프랑스 인상주의 화가 클로드 모네, 미국 현대미술의 거장 월터 드 마리아와 제임스 터렐의 작품뿐이다. 전시공간의 구조와 작품 배치는 예술과 풍경이 어우러지도록 하겠다는 건축가의 철학을 반영한다. 이탈리아 대리석 70만개로 바닥을 장식한 클로드 모네의 전시공간이나, 지성소(至聖所)의 엄숙함을 풍기는 듯한 월터 드 마리아의 작품 '타임/타임리스/노 타임', '빛의 작가'라는 명성을 확인하게 하는 제임스 터렐의 작품 '오픈 스카이'의 전시장까지 모두 자연광을 활용하고 있다. 천변만화하는 시코쿠의 날씨에 따라 작품을 접할 때마다 늘 다른 느낌을 받게 하려는 의도라고 한다. 땅 속 전시장에서 빠져나오면 눈부신 세토 내해의 풍광이 한 눈에 들어오는 야외 테라스로 연결된다.

지추 미술관 전경. 풍경과 예술의 조화라는 건축철학을 웅변한다. ⓒ Fujitsuka Mitsumasa 


풍경과 예술의 기묘한 조화는 이곳뿐 아니라 베네세하우스 미술관에서도 경험할 수 있다. 가령 미국 현대미술 작가 제니퍼 바틀릿의 '옐로우 앤드 블랙 보트'라는 설치작품을 감상한 뒤 미술관 1층 광장으로 나와 멀리 해변으로 시야를 돌리면 작품의 소재가 된 노랗고 까만 보트가 포착된다. 바틀릿의 작품을 바닷가에 재현한 것으로, 이쯤되면 관람객들은 어느 것이 풍경이고 어느 것이 예술인지 분간을 못할 정도다. 도쿄에서 왔다는 관광객 와타나베 료(35ㆍ웹디자이너)씨는 "한적한 어촌의 자연 풍광과 현대미술을 접목시킨 나오시마의 느낌은 특별하다"며 "5일 동안 휴가를 받아 나오시마와 인근 섬들을 찾기로 한 결정이 후회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불모의 섬이 현대미술의 메카로

섬 둘레 16㎞, 인구 3,300여명. 크기는 여의도 정도에 불과하지만 나오시마는 요즘 1년에 섬 인구의 100배가 넘는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가 됐다. 세계적 여행전문지 콘드 나스트 트래블러는 이 작은 섬을 파리, 베를린, 두바이 등과 함께 '세계 7대 관광지'로 선정하기도 했다.

나오시마는 불과 20여년 전만 해도 죽어가는 섬이었다. 1917년 섬 북쪽에 미쓰비시사가 중공업단지를 건설한 후 70여년 간 구리 제련소에서 나오는 연기와 폐기물로 섬은 황폐화됐다. 1960년대 8,000여명이던 인구는 1980년대 중반 무렵 절반으로 줄었다. 생기를 잃어가던 이 섬의 역사가 바뀐 것은 한 기업의 의지 덕분이다. 일본의 대표적 교육기업 베네세그룹의 전신인 후쿠다케 출판사의 후쿠다케 데쓰히코 대표가 기업의 사회공헌 차원에서 1980년대 중반 이곳에 어린이들을 위한 캠프장 건설 계획을 세운 것이 계기가 됐다. 후쿠다케 데쓰히코 대표가 1986년 급작스레 사망하자 아들인 후쿠다케 소이치로 베네세그룹 회장이 유지를 이어받았다. 그는 1980년대말 세계적 건축가 안도 다다오와 교유하기 시작했고 이 섬에 예술적 영감을 불어넣기로 마음 먹었다.

나오시마의 명소인 대중목욕탕 'I♥湯' . 화려한 외부 장식이 인상적이다. 

안도의 설계로 베네세하우스 미술관(1992년), 지추 미술관(2004년), 이우환 미술관(2010년) 등이 차례로 들어섰고 브루스 나우먼, 잭슨 폴록, 앤디 워홀 등 현대미술 거장들의 작품으로 섬이 채워졌다. 베네세그룹이 지금까지 나오시마에 투자한 돈은 460억엔. 투자에 비해 수익이 그다지 나지 않는 사업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은 "경제는 문화의 시녀"라고 강조한다. 문화의 힘을 결코 돈으로 환산할 수 없다는 신념의 표현이다.

그러나 경제적 효과도 만만치 않다. 현재 나오시마는 가가와현 35개 지자체 중 소득 1위다. 인구감소세도 2001년을 기점으로 서서히 완만해지고 있다. 60년간 이 섬에 살았다는 주민 오가사라와 마사에(87)씨는 "20년 전만 해도 식당도 잠잘 곳도 한두 군데밖에 없었지만 요즘은 한 해에 5~6곳씩 생겨나는 것 같다"며 "처음에는 예술마을 건설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던 이들도 있었지만 요즘은 나오시마 주민이라는 사실에 자부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나오시마 효과'의 확산

나오시마의 성공은 이웃 지역으로도 확산되고 있다. 한센병 환자들의 요양섬으로 쓰였던 오시마(大島), 일본 최악의 산업폐기물 투기 사건이 발생했던 데시마(豊島), 제련소가 폐쇄되며 쇠락한 이누지마(犬島) 등에서도 이에 프로젝트 같은 작업이 진행되거나, 폐쇄된 산업시설을 미술관으로 바꾸는 등 예술섬으로 변모하고 있다.

'이에 프로젝트' 로 변신한 집들이 모여있는 혼무라. 이곳 노인들은 자원봉사로 관광객들을 안내한다.

나오시마, 데시마 등 세토 내해 섬 7곳에서 올해 7월부터 열리고 있는 '세토우치 국제예술제'는 나오시마 모델의 지속성을 예상하게 한다. 당초 예술제 방문객은 40만명 정도로 예상됐지만 10월초까지 벌써 60만명이 넘는 인파가 몰렸다. 전시 작품의 관리와 작가 섭외는 베네세그룹이, 예산 지원과 홍보는 가가와현이, 운영은 2,400명이 넘는 지역의 자원봉사자들이 맡는 등 정부와 기업, 민간의 역할 분담이 이상적으로 이뤄진 것이 성공요인으로 꼽힌다.

이 예술제의 총감독은 니가타현의 농촌마을에 현대미술 작품을 전시하는 에치고 쓰마리 트리엔날레를 기획해 일본의 대표적인 지역 예술축제로 자리잡게 한 기타가와 후라무. 예술제를 통해 나오시마의 기적을 확산시키겠다는 의지를 가진 그는 "글로벌화, 균질화, 효율화의 물결 속에 인구가 감소하고 고령화되고 고유성을 잃어가던 섬들이 활력을 되찾아가고 있다"며 "이번 예술제의 성공은 지금까지 조역이었던 장소가 주역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마쓰다 게이치 세토우치 국제예술제 추진실 주임은 "나오시마를 중심으로 한 세토우치 예술제의 성공은 외부에 무관심하고 자신들의 삶에 회의적이었던 주민들로 하여금 자부심을 갖도록 했다"며 "이는 관광객 증가, 수입 증대 등 외형적 성장보다도 더욱 의미있는 변화"라고 말했다.


"창조지역 중심엔 문화가 있다… 골목길 하나, 숲 하나서도 시작"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최상철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
'아리랑의 고향 정선 조성' 등 창조지역 사업 13개선정


최상철지역발전위원회위원장 

각 지역의 문화와 정체성을 토대로 한 '지역 재생'이 세계적 흐름으로 자리잡은 가운데 국내에서도 새로운 시도들이 시작되고 있다. 대통령 직속기구인 지역발전위원회가 올해 시작한 '창조지역' 사업은 철저하게 콘텐츠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는 점에서 눈길을 끈다.

지역발전위원회는 최근 내발성, 독창성, 지역개발효과라는 3가지 기준으로 12개 지역의 13개 사업을 창조지역 사업으로 선정했다. 강원 정선군의 '아리랑의 고향 정선 조성' 사업, 전래동요 '고추먹고 맴맴'의 발상지라는 점에 착안해 전래동요와 예술교육을 접목시킨 충북 음성군의 '동요 에듀케어 프로젝트', 국내 최초의 공룡 화석 발견지라는 콘텐츠와 영상산업을 결합시킨 경남 고성군의 '공룡 특화 자원화 사업'등이 대표적이다. 지역발전위원회는 사업의 규모에 따라 1억~62억원의 예산을 지원해 지역의 창조산업에 활기를 불어넣을 예정이다.

최상철(70) 지역발전위원회 위원장은 "지금까지는 지역 개발 하면 도로를 건설하고 집이나 공장을 짓는 것을 떠올렸지만 앞으로는 소프트웨어 중심으로 바뀌어야 한다"며 "창조지역의 중심에는 문화가 있다"고 사업 취지를 설명했다. 최 위원장은 "사업 공모에 96개 지자체에서 270건을 신청했을 만큼 열기가 뜨거웠지만 기존에 하던 수익사업을 이름만 바꿔 내놓은 것이 많아 안타까웠다"면서 "창조지역에 대한 지자체 공무원들의 인식 전환이 급선무라는 생각이 들어 관련 가이드북을 제작해 배포하고 교육도 실시하기로 했다"고 말했다.

최 위원장은 "창조는 작은 골목길 하나, 숲 하나에서도 시작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의 경우 건축가 가우디를 통해 도시 이미지를 구축했고, 영국의 리버풀은 비틀스라는 유산을 활용해 문화도시로 거듭나지 않았습니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에 대한 자존심을 살려주는 것은 바로 문화입니다. 창조지역 사업은 지역 주민과 지자체가 그들만의 차별화된 문화를 발견하고 발전시킬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하고 정책적 지원을 해주는 것입니다."


미국 피츠버그대에서 도시계획학 박사학위를 받고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 한국지방자치학회 회장 등을 지낸 최 위원장은 국내 대표적인 도시계획 전문가다. 그는 "도시에도 삶과 죽음이 있다. 어떤 도시도 영원할 수는 없다. 잘 나가는 도시도 언제나 새로운 창조적 아이디어를 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김지원기자
사진 배우한기자

쇠락해가는 농어촌이 예술마을로 거듭나


[세계의 소프트시티를 가다] 국내 사례, 옥천 '향수 30리-시문학 아트벨트' 등

옥천 장계유원지의 시비.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시인들의 작품이 새겨져 있다. 

쇠락해가는 농어촌 지역에 예술작품을 설치하고 주민들로 하여금 예술적 체험을 하게 함으로써 활기를 불어넣으려는 사업은 한국에서도 각지에서 전개되고 있다.

충북 옥천군의 '향수 30리_시문학 아트벨트' 조성사업은 이 지역 출신 시인인 정지용(1902~1950)을 테마로 한다. 사업의 주요 내용은 옥천군 안내면 장계유원지, 그리고 유원지에서 옥천읍의 정지용 생가에 이르는 37번 국도변을 정지용을 소재로 한 미술작품으로 꾸미는 것. 1990년에 조성됐으나 위락시설, 상점 등이 노후화해 활기를 잃어가던 장계유원지는 이 사업에 힘입어 대대적 변신을 했다. 정지용 시인의 작품 구절을 유리창에 새긴 서점, 정지용문학상을 받은 시인들의 시비, 정지용의 시 구절이 새겨진 벤치, 원고지를 형상화한 조형물이 설치되는 등 유원지는 문학과 미술이 어우러지는 공간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변신한 장계유원지를 찾은 사람들의 수는 지난 9월까지 3만6,048명으로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30% 이상 증가했다. 옥천군은 농촌 고유의 정서를 대변하는 정지용 시인의 작품세계와 잘 어울리는 예술작품들을 지역 곳곳에 배치함으로써 옥천을 '지나쳐 가는 공간'이 아니라 '머물 수 있는 공간'으로 만들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충남 공주시 계룡면의 평범한 농촌마을인 중장리도 농사를 주제로 한 다양한 벽화와 함께 설치미술 작품들로 꾸며지면서 예술마을로 거듭났다. 울산 남구 장생포동의 낙후된 마을이었던 신화마을도 마을의 역사와 관련 있는 고래, 바다를 소재로 한 벽화와 간판, 조명 등을 설치해 면모를 일신하고 있는 지역으로 꼽힌다.

<저작권자 ⓒ 인터넷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입력시간 : 2010/10/20 21:08:01  수정시간 : 2010/10/20 21:20: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