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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시각

‘디자인 서울’을 다시 디자인하라

‘디자인 서울’을 다시 디자인하라
[매거진 esc] 서울-서울시-서울시민의 삼각관계를 고민하는 디자인학도와 디자이너들

서울 상징 ‘해치’ 가면 쓰고 광고판·포스터에 말풍선 스티커 작업  

» (왼쪽부터) 디자인 창작 그룹 ‘에프에프’의 민성훈, 장우석, 최보연, 조성도씨. 
 
급격한 성장의 산물이자 대한민국 국민 4분의 1이 살고 있는 거대 수도 서울, 세계의 다른 수도를 따라 하느라 몇 년을 주기로 맞지도 않는 옷을 갈아입으며 수십개의 건물을 부수고 짓는 서울, 과거와 현재가 절묘하게 뒤섞인 매력적인 도시 서울. 서울이 삼각관계에 빠졌다. 한쪽은 디자인정책 등 온갖 정책으로 더 발전하고 성장하라는 서울시, 다른 한쪽은 정신없이 달라지는 서울의 모습을 아쉬워하며 천천히 자연스럽게 변화하길 바라는 서울시민이다. 각자 자기만의 방식으로 사랑을 표현하는 이들과 이들의 애정공세에 난감해하는 서울. 그런데, 이 삼각관계에 변수가 나타났다.

서울대 디자인 전공자들 주축…서울시 광고판 공격

2호선 합정역 2번 출구로 나가다 보면 커다란 광고판이 보인다. 서울 전역에서 볼 수 있는 하늘색 광고판에는 ‘4色 매력 한강공원’이라는 상투적인 문구와 함께 두 남녀가 지나가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활짝 웃고 있다. 그 위에 동그랗게 비워진 말풍선에 이런 문구가 쓰여 있다. ‘서울은 원래 좋아요.’ 어라, 어색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서울이 좋아요’라고 쓰여 있었는데, ‘서울은 원래 좋아요’라니? ‘원래’라는 단어가 들어가니 그 의미가 완전히 바뀌었을 뿐만 아니라, 광고판의 이미지와 겹쳐지면서 웃기기까지 한다. 이거 서울시를 홍보하는 광고판 아니었나? 자세히 보니, ‘서울은 원래 좋아요’는 원래 광고판 위에 붙은 스티커다. 
 
» ‘아이라이크서울’ 캠페인으로 서울시 홍보 포스터 위에 스티커가 붙여진 모습. ‘에프에프’ 그룹 제공 

서울시를 홍보하는 광고판과 포스터가 위험하다. 목격자들에 따르면 서울시 캠페인 홍보물 위에 스티커를 붙이는 이들은 서울의 상징인 해치 가면을 쓰고 다니는 해치맨이다. 고담시를 지키는 배트맨도 아니고 서울시 캠페인 포스터에 스티커를 붙이고 다니는 해치맨이라니. 문제의 해치맨들이 최근 서울시내 곳곳에 출몰해 서울시를 홍보하는 지하철과 버스, 길거리 광고판 등을 훼손하고 다닌다는 제보가 잇달아 들어왔다. 가만히 두고 볼 수 없어 이들을 수소문했다. 영화 <배트맨> 속 기자 킴 베이싱어가 배트맨을 힘들게 찾아낸 것처럼 이들을 찾는 데 꽤나 시간이 걸릴 줄 알았는데, 웬걸. 너무 쉽다. 이들은 홈페이지(ilikeseoul.org)와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twitter@ilikeseoul, me2day.net/ilikeseoul)에 대놓고 자신들을 노출했다. 심지어 자랑스럽게 ‘비공식 불법 디자인서울 캠페인’이라는 문패도 내걸었다. ‘비공식 불법 디자인서울 캠페인’의 이름은, 아이러니하게도 ‘아이라이크서울’이다.

이 캠페인을 벌인 이들의 정체는 서울대 디자인학부(디자인 전공) 재학생인 장우석씨, 민성훈씨와 졸업생인 최보연씨, 디자인 관련 사업을 하는 조성도씨다. 이들은 디자인 창작 그룹 ‘에프에프’(ff)로 활동하고 있다. ‘아이라이크서울’ 캠페인은 지난해 민성훈씨가 던진 질문에서 시작됐다. “‘왜 서울이 세계디자인수도가 됐을까?’ 궁금했어요. 디자인수도를 선정하는 쪽 관계자부터 서울시 디자인 사업 관련 공무원까지 다양한 이들을 만나서 인터뷰했어요. 그런데 막상 제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학교가 있는 관악구의 노점상 정리였죠. 정말 디자인이 세상을 아름답게 만들 수 있을까, 의문이었어요. 그러다가 어느 순간 세계디자인수도 서울에 대한 의견만 남고 막상 제가 하고 싶은 얘기는 못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죠. 그런 고민을 친구들과 나누다가 디자인을 공부하는 그래픽 디자이너로서 디자인으로 말할 수 있는 것들을 찾기로 했어요.” 

» 시민들이 보낸 문구를 인쇄한 스티커를 붙이는 모습. ‘에프에프’ 그룹 제공

‘서울시와 서울시민의 소통’ 끌어내는 게 목적
민성훈씨는 함께 디자인 관련 스터디와 프로젝트를 해왔던 장우석씨, 최보연씨와 함께 머리를 맞댔다. 구글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인 디자이너 이지별씨의 ‘버블 프로젝트’를 떠올렸다. 뉴욕 시내의 수많은 광고 포스터에 말풍선 모양 스티커를 붙이고 누구나 그 위에 원하는 말을 쓸 수 있도록 한 이 프로젝트는 이지별씨의 아이디어로 뉴욕에서 시작해 지금은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그러던 중 서울 거리를 뒤덮은 하늘색 서울시 홍보 캠페인이 레이더망에 들어왔다. 서울시민들이 서울에 하고 싶은 말을 스티커에 인쇄해 ‘서울이 좋아요’라는 문구 위에 붙이는 캠페인을 벌이기로 결정하고, 더욱 넓은 접점을 만들기 위해 각자의 인맥으로 홍보를 하다가 조성도씨를 만났다. 조성도씨는 트위터나 미투데이 등을 이용해 그 접점을 무한대로 끌어들였다. 그렇게 지난달부터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를 통해 사람들에게 서울시에 대한 문구를 약 150개 받았고, 지금까지 400여장의 스티커를 붙이고 다녔다.

‘디자인 서울, 그저 웃지요’, ‘서울이 좋은지는 우리가 판단할게요’, ‘와! 서울이 서울랜드가 되었어요!’, ‘한강에 나무 좀 그만 뽑으세요, 그늘이 하나도 없어요’ ‘진짜 우리 문화는 치워버리고 어디서 이상한 것만 주워다 놨어요’, ‘서울은 365일 공사중’, ‘서울사람은 고향이 없어요, 디자인됐으니까요’ 등이 서울시 홍보 포스터 속 ‘서울이 좋아요’를 대신해 그 자리에 들어간 문구다. 사람들이 보내온 문구는 지금 서울에 대한 진짜 생각이 그대로 드러난다.

스무살에 부산에서 서울로 왔다는 장우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어릴 때는 서울에 대한 동경이 있었어요. 실제 수많은 문화적 움직임이 있는 곳이 서울이죠. 한편으로 서울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너무 빨리 부정하고 새로운 것을 세우는 데 혈안이 돼 있어요. 정책이 아니라 사람의 힘으로 자생하는 게 서울인데 말이죠. 서울시를 디자인한다는 건 성형한다는 의미예요. 거기에서 디자인은 오만함일 뿐이죠.” 최보연씨 역시 “서울은 트렌드와 새것에 민감해서 그런 식의 가치를 최우선으로 놓고 세계의 유명 디자인을 데려와 만든 것들로 원래 있던 것들을 대체한다”고 아쉬워했다. “디자인이라는 단어를 통해 환상적인 이미지만을 강조해요. 도시를 디자인한다는 게 맞는지에 대한 논의부터 있어야 할 것 같은데 말이죠.”

‘아이라이크서울’ 캠페인을 단순히 서울시 디자인 정책에 반대하는 움직임으로 규정하면, 말 그대로 재미없어진다. 이들은 “더 직접적인 소통을 위해 스티커를 붙이는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서울시 디자인 정책에 대한 반대 목소리가 이번 캠페인을 통해 나오면, 이 캠페인 자체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오고 그렇게 서울시와 서울시민이 서로 얘기를 나누는 사이가 되는 게 궁극적인 목표다. 스티커를 붙이는 행위 자체가 불법인 것도 이들의 캠페인 전략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이 캠페인을 통해 서울에 대한 생각을 나눌 수 있으면, 그것만으로 이 캠페인은 성공이라는 얘기다. 아직까지 그 어떤 곳으로부터도 ‘항의’를 받지 못했다는 이들은 ‘항의를 받는 그날까지’ 캠페인을 계속해나갈 생각이다. ‘아이라이크서울’ 캠페인의 진행과정은 다큐멘터리로 기록돼 6월2일 인사미술공간에서 열리는 ‘디자인올림픽에는 금메달이 없다’ 전시에서 상영된다.

글 안인용 기자 nico@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한겨레신문 2010.05.19
http://www.hani.co.kr/arti/specialsection/esc_section/421506.htm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