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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기타

희롱의 수단, 사랑의 도구

[매거진 esc] 현시원의 디자인 극과극 
  

» 우산: 모마 온라인스토어 제공, 부채: 윤운식 기자   
 
부채는 이집트 시대부터 한여름 바람을 일으켰던 아주 오래된 사물이다. 조선의 왕은 한여름이면 도화서 화원들에게 부채에 그림을 그리게 해 신하들에게 선물했다. 여름이면 인사동 거리엔 각종 부채들이 쏟아진다. 옛 부녀자가 사용했던 ‘단선’ 모양의 둥근 부채부터 양반들이 손에 쥐고 다녔던 쥘부채, 파닥거리는 중국산 부채까지 모양새 또한 다양하다. 유난히 뜨거웠던 이번 여름 광고문안이 쓰인 부채를 길거리에서 두 번쯤 거부했다. 부채를 얕잡아 본 것이다.
부채 중에서도 접이식인 ‘접선’(쥘부채)은 더운 날씨와 뜨거운 가슴 앞에서 다층적인 변신술을 구사한다. 부채의 몸짓은 날개를 180도로 쫙 펴는 예쁜 공작새 같다. 사각형으로 접혀 있는 부챗살이 근육처럼 펼쳐지면서 바로 내 눈앞에서 바람결이 인다. 부채로 장단을 맞춰 벗의 흥을 돋우고, 접힌 부챗살을 착 열어 수줍은 척 얼굴을 가린다. <디자인, 일상의 경이>의 저자인 뉴욕 현대미술관 큐레이터 파올라 안토넬리도 쥘부채 디자인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유럽에 접는 부채가 소개된 것은 18세기 초반이었다. 이후 다양한 그림과 자수가 더해지고 희롱과 소통의 기능까지 포괄하게 되면서 부채는 제작과 사용의 측면 모두에서 예술의 경지로 도약했다.”

제작의 측면에서 예술의 경지라는 말은 알아듣겠는데, 사용의 측면에서 예술의 경지로 도약했다는 건 무슨 말일까? 그 예시가 재밌다. 19세기 영국의 총리 벤저민 디즈레일리는 “부채가 초래하는 계급의식과 질투의 감정이 칼보다 더 위험하다”고 부채의 해악에 목을 높였다. 19세기 유럽의 상류층 젊은이들은 비밀스러운 쾌락의 수단으로 부채를 사용했고, 구혼자에게 부채를 통해 사랑의 밀어를 전했다. 부채로 손바닥을 확 밀어 치고 결정적인 한마디를 했단다. “넌 아웃이야.” 어디 유럽에만 부채표 밀어가 있었을까. 우리에게도 이런 시가 있다. “부채 보낸 뜻을 나도 잠깐 생각하니 가슴에 붙는 불을 끄라고 보내도다. 눈물도 못 끄는 불을 부채라서 어이 끄리.” <고금가곡>(古今歌曲)의 한 장이다. 쥘부채야말로 손, 부채, 바람을 이용한 ‘아는 사람만 알아듣는’ 의사소통의 디자인이다.

사랑의 밀어를 나누기에 좋은 건 우산도 마찬가지다. 가까운 사람끼리만 서로 부채로 바람을 내주기도 하는 것처럼 우산을 함께 쓸 수 있는 사이란 아끼는 친구 이상의 관계다. 작은 텐트처럼 봉긋한 우산 아래에서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피한다. 둘 중에 한 명, 꼭 비를 더 맞는 어깨가 있기 마련이지만, 크게 문제되지 않는다. 우산 디자인 또한 부채처럼 우산의 덮개를 받쳐주는 가는 뼈대인 우산살을 기본으로 한다. 지금 내가 들고 있는 우산은 여섯 개의 우산살이 천을 떠받들고 있다. 쥘부채의 부챗살이 좌우 수평으로 이동한다면 우산의 우산살은 위아래로 움직인다. 가끔 천둥·번개를 동반한 강한 비가 내리면 우산살은 수직으로 뻗어 역삼각형 모양으로 엉망진창 소박맞은 듯한 형상이 되기도 한다. 물론 부채는 태양을 피하기 위해, 우산은 비를 피하기 위해 쓰인다는 점에서 각각의 사물은 정반대의 기후 상태에서 환영받는다.

현시원 독립 큐레이터 sonvadak25@hanmail.net 

기사등록 : 2010-08-25 오후 05:33:41  기사수정 : 2010-08-25 오후 05:4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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