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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디자인도 인생도 결국은 놀이다

art talk, 하비에르 마리스칼
디자인도 인생도 결국은 놀이다
참 가볍다는 생각이 절로 드는 사람이다. 격식을 차리지 않고 그저 자기 안에 쌓인 무언가를 표현하려 든다. 편견으로 바라보면 철없는 사람일 뿐인 그를 세상은 천재라고 부른다. ‘아트 플레이어’ 하비에르 마리스칼의 이야기다.
 
가끔 천재들의 삶을 들여다보면 한국에서 태어나지 않아 다행이라는 안도감이 들 때가 있다. 획일화된 잣대로 규정짓고 평범함의 틀에 가두기 좋아하는 이 나라에서라면 그 놀라운 천재성도 박제가 되어버렸을지 모른다는 두려움과 약간의 슬픔이 차오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하비에르 마리스칼(63)은 어땠을까. 난독증을 앓았으니 아마 어린 시절부터 글도 못 읽는 바보로 규정지어져 편견에 부딪쳤을 것이고 산만한 태도는 당장 회초리감이었을 것이다. 자유롭다는 표현조차 뻔한 수식어가 될 뿐인 은발의 노신사에게 대한민국의 상식이 거장에게 요구하는 위엄이나 품격은 조금도 없다. 시종일관 장난스럽고 유쾌하다. 산만하고 아이처럼 천진하다. 이토록 가벼운 거장이라니. 생생하게 날뛰는 창의력을 가진 마리스칼에게는 삶이 곧 놀이이자 예술이다. 그의 틀 없는 자유가 만들어내는 예술 작품에 지금 세계는 열광하고 있다.

세계적인 디자인 그래픽의 거장 하비에르 마리스칼이 현대카드 컬쳐 프로젝트 13번째 주인공으로 선정돼 한국을 찾았다. 그래픽 디자인, 가구와 인테리어, 영화에 이르기까지 분야를 가리지 않고 폭넓은 디자인 활동을 펼치고 있는 하비에르 마리스칼전은 아시아 최초이고, 역대 최대 규모다.

난독증을 가진 천재,
세상을 이미지로 기억하다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로 예술가의 길을 걷기 시작한 스페인의 아티스트 하비에르 마리스칼이 세계적인 거장으로 이름을 알린 것은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이다. 마리스칼은 올림픽 마스코트인 코비(Cobi)를 탄생시켰다. 코비는 스페인 카탈루냐 지방의 양치기 개를 입체적인 형식으로 의인화한 캐릭터로서 이전까지 올림픽 마스코트가 가지고 있던 전형적인 특징을 뒤엎은 획기적인 디자인으로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조직위원회의 스페인어 약자에서 이름을 딴 코비는 마라톤을 하거나 바에서 맥주를 마시는 등 일상적이고 친근한 캐릭터로 표현돼 20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세계가 코비와 마리스칼에게 주목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틀에 박히지 않은 자유로움 때문이었다. 코비는 전형성이라곤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독창적인 매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 창의적이고 유쾌한 에너지를 가진 디자이너에게 관심이 쏟아졌다. 예술가가 가진 재능의 원천을 한 가지로 국한시키는 일 역시 편견이자 평범한 시각에 불과하겠지만 마리스칼의 재능은 난독증에서 기인한다는 분석이 많다. 그는 글로 세상을 이해하는 대신 그림으로 받아들이고 상상으로 가지를 키워나가는, 일반 사람들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생각하고 상상한다.

“저는 난독증이라는 병을 앓았습니다. 단어를 잘 기억하지 못하고 읽고 쓰는 데 서툰 편이죠. 때문에 저는 생각하고 기억하는 방식이 남들과는 다릅니다. 아내 이름이 모니카(Monica)인데 자꾸 잊어버려서 아내 이름의 머리글자 ‘M’을 만든 다음 그것을 보며 기억하고 있어요. 두 아이의 이름도 자꾸 잊어버려서 아이들의 이름을 딴 작업도 했죠.”

글자를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사고의 체계는 방향을 예측하기 힘들 만큼 전방위로 튄다. 읽기에 어려움을 겪지만 반대로 상상의 제약은 사라졌다. 난독증이라는 장애를 예술로 승화시킨 <바르셀로나(BAR CEL ONA)>(2006)는 그가 문자를 어떤 방식으로 받아들이는지 조금이나마 이해해볼 수 있는 작품이다. 직관적이고 단순해 보이지만 마리스칼만의 상상력이 담긴 작품들은 많은 이들에게 공감을 자아냈다. 난독증 덕분에 세상 사람들과 소통할 수 있는 그만의 작품 세계를 완성하게 됐다.

“제가 잘하는 부분이 바로 상상하는 것이고, 다양한 색상들을 사용해 그림을 그리는 것입니다. 저는 일할 때 항상 무언가를 상상하고 이미지를 통해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마리스칼은 지금도 문자를 읽지 못한다. 세계적으로 명성을 얻은 지금에야 난독증이 그의 천재성을 더욱 빛나게 해주는 작은 가시 정도로 생각하지만 어린 시절에는 친구들에게 놀림거리가 됐고, 그 때문에 늘 위축되어 살았다.

결국 자신의 한계를 이겨내고 재능을 꽃피운 마리스칼은 전시회 개막일에 난독증을 앓고 있는 한국 어린이들과 만나 특별한 시간을 가졌다. 전시회 첫 손님인 아이들을 특유의 장난기 넘치는 태도로 대했다. 의자가 아닌 테이블에 앉고 신발을 던져버리는 행동에 잔뜩 긴장한 아이들도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왜 그렇게 정직하게 앉아 있는지 모르겠다”며 바닥 위에서 슬라이딩을 하거나 테이블 위에 놓인 마커펜 냄새를 맡으며 “품질이 최고다”라고 칭찬하기도 했다. 아이들과 마리스칼 사이에는 50여 년 가까운 시간이 있고 언어의 벽도 높았지만 그는 예술로써 벽을 허물고 소통했다. 아이들은 마리스칼의 지도 아래 자신만의 작품을 만들었다.

마리스칼이 글자를 알았더라면 지금과 같은 명성이나 창의적이고 자유분방한 작품을 만나지 못했을 것이다. 대중이 그의 작품을 보며 이런 생각을 하듯 마리스칼도 난독증을 앓고 있는 아이들을 동정하지 않는다. 그저 창의력으로 충만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이 부러울 뿐이다.

“아이들은 우리보다 훨씬 똑똑하고 충분한 지성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은 나이 먹고 어른이 되면서 점점 지루해지고 따분해지는 것 같은데 아이들은 어른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는 특별함이 있습니다.”

여전히 나는 방법을 잊지 않은
피터팬

좋아하면 닮아간다고 할까, 아이들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진 마리스칼의 행동을 관찰해보면 그는 여전히 어린아이다. 한시도 몸을 가만히 두지 못한다. 분주히 움직이고 생각하는 대로 행동한다. 기자들의 질문에 성심성의껏 대답하다가도 뒷벽에 부착된 캐릭터를 따라 포즈를 취하고 자리에서 일어나 커다란 동작으로 설명에 힘을 보탠다. 전시회 주최사의 이름을 기어이 기억하지 못해 앞자리에 앉은 기자에게 질문하거나 “난 스페인 사람인데 왜 영어를 써야 하는지 모르겠다”면서 투덜댄다. 순간순간 벌어지는 돌발 행동이 밉지 않은 이유는 마리스칼 그 자체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내면의 자유를 숨기지 않고 자연스럽게 살고 싶어 한다.

“저는 아이들과 교류한 경험이 많습니다. 얼마 전에는 아직 어려서 언어로 소통이 어려운 아이들끼리 놀이를 통해 금세 친해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제 앞에 놓여 있는 평범한 물건들도 아이들에겐 하나의 장난감이 될 수 있죠. 자유롭게 놀이를 즐기는 과정을 통해 서로 교류하는 아이들의 모습을 보면서 그들만의 공통적인 언어, 특별한 언어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놀이라는 행위를 통해 서로 친밀하게 소통한다는 느낌을 받았어요. 만약 여러분이 아이처럼 물건을 가지고 장난치며 놀았다면 어땠을까요. 아마 ‘여기는 중요하고 엄숙한 행사가 진행되는 곳입니다. 여기서 나가주세요’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어른의 언어인 문자로 소통할 수 없는 마리스칼은 아이의 언어인 놀이로 세상과 소통한다. 유치한 놀이의 즐거움이 그의 삶을 관통하고 있다. 그것이야말로 마리스칼의 예술을 지탱해온 강력한 원천이다. 단순하고 귀엽지만 알록달록한 색채를 이용해 직관적으로 표현하는 그의 작품들은 놀이와 예술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래서 마리스칼은 스스로를 ‘아트 플레이어’라 칭한다.

“이번 전시회를 통해 세계인의 공통 언어라고 할 수 있는 놀이를 보여주고 싶어요. 놀이를 통해 새로운 것이 창조되고 상상력도 커져요. 내가 디자인 작업을 하면서 다짐한 것 중 하나가 절대 놀이를 멈추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놀이는 결코 어린아이의 전유물이 아니다. 유치한 것, 어른이 되기 위해서 버려야 하는 것이 아니다.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자유롭게 비행할 수 있는 비밀의 열쇠가 바로 놀이다.

“저는 어른이 되면 진지해져야 한다고 믿지 않습니다. 나이 들어도 진심을 다해 아이들의 문화를 즐기고 싶습니다. 우리는 항상 ‘놀이’를 해야 하고, 바로 그것이 우리가 삶의 즐거움을 찾는 하나의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마지스’에서 생산한 강아지 모양 의자 ‘훌리앙’과 어린이용 장난감집 ‘빌라 훌리아’.

경계 없는
전방위 아트 플레이어

마리스칼은 디자이너지만 디자이너가 아니다. 디자이너라는 단어 안에 가두기엔 그의 활동이 광활하고 벽이 없다. 1970년대 스페인에서 활동을 시작하면서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이너를 겸한 그는 캐주얼 신발, 패션 브랜드와 컬래버레이션 작업으로 브랜드에 생생한 일상의 얼굴과 활력을 불어넣었다. 특히 스페인의 빅토리아 가스테이즈에 위치한 레스토랑 인테리어를 맡았는데 입구의 글꼴과 게 모양 조명은 마리스칼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흔적으로 남아 있다. 마리스칼은 회화, 만화, 영화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는데, 이번 전시회에는 그의 다양하고 창의적인 예술 영역을 보여주는 1천2백여 점의 작품을 전시한다.

“이번 전시를 통해 많은 이들에게 행복감을 전해주고 싶습니다. 이번 전시에서 중점을 둔 부분은 바로 공간을 디자인한다는 점이었는데요. 공간 안에서 물체들이 움직이고 이동하는 모습들을 흥미롭게 관람해주셨으면 합니다. 예술은 곧 하나의 커뮤니케이션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부분을 전시를 통해 보여드리고 싶어요. 많은 분들이 예술의 아름다움을 이해하고 예술이 우리 삶에 있어 중요하다는 것을 느끼고 돌아가셨으면 합니다.”

그의 드로잉은 어린아이가 그린 것처럼 꾸밈없고 순수하다. 빠르게 그려내는 그림들은 언뜻 의미 없는 선의 연결처럼 보이지만 섬세한 예술적 감각이 느껴진다. 그의 미감을 느낄 수 있는 드로잉을 이번 전시회에서 만날 수 있다. 마리스칼 특유의 화려한 색감이 빠진 무채색의 드로잉은 진열대에 늘어놓으면 지루하기 마련이지만 마리스칼은 자신의 독특한 아이디어를 발휘해 벽면을 가득 메워 숲처럼 연출했다. 하나의 숲처럼 보이는 이 독특한 공간의 매력을 살리려고 매미 소리, 새소리 효과음도 넣었다. 마리스칼 스케치의 숲이자 마리스칼 예술의 근간을 이루는 아이디어의 숲이다.

가구와 인테리어 디자인 작품도 전시된다. 화려한 컬러와 독특한 외형을 가진 디자인 가구는 마리스칼의 창의력과 상상력이 실생활과 연결됐을 때 얼마나 세상을 풍성하고 다채롭게 만드는지 보여준다. 인간의 뇌를 형상화한 것으로 알려진 분홍색 미로나 초대형 작품에는 절로 발길이 멈춘다. 행복한 상상력들이 전시회장을 가득 채우고 있다.

“디자이너로서 제 역할은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창조물을 만들어내는 것입니다. 전시를 보러 온 관객들이 작품을 통해 행복을 느꼈으면 좋겠습니다.”

마리스칼은 2010년 또 다른 분야에 도전했다. 영화감독 페르난도 트루에바와 장편 애니메이션 <치코와 리타>를 공동 연출했다. 영화는 젊은 시절부터 그의 마음을 홀렸던 장르다. 때문에 애니메이션 연출은 필연적인 선택이었다.

“제가 처음 영화를 만들기 시작한 때는 1971년이었어요. 당시 나이로 21살이었습니다. 그래픽을 통해 움직이는 영상 작업을 했는데 무척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그래서 영상 작업은 좀 더 성장한 뒤에 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었죠.”

애니메이션을 공동 연출한 페르난도 트루에바는 1992년 <아름다운 시절>로 아카데미 최우수 영화상을 수상한 직후 할리우드로 무대를 옮긴 거장이다. 마리스칼은 그의 영화 <칼레 54>, <브란코 이 네그로> 포스터를 제작했다. 예술적인 공감대를 바탕으로 인연을 이어온 두 사람은 결국 하나의 애니메이션을 연출하기에 이르렀다. 페르난도 트루에바가 연출과 각본을 맡고, 하비에르 마리스칼이 작화를 맡은 <치코와 리타>는 감각적인 영상미와 음악으로 주목받았다.

“1980~1990년대 컴퓨터가 개발되면서 몇 차례 영상 작품을 작업할 기회가 있었어요. 그러던 어느 날 페르난도 트루에바 감독이 저에게 함께 영화를 만들어보자고 제안했습니다. 그 순간, 지금이 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라고 생각했습니다. 아티스트라면 누구나 꿈꾸는 것이 바로 많은 관람객들이 한곳에 모여 자신의 작품을 관람하는 모습일 것입니다. 저 또한 <치코와 리타> 작업을 하면서 굉장히 행복했고, 이처럼 저에게 큰 기쁨이 된 영화 작업을 앞으로도 계속 이어갈 생각입니다.”

<치코와 리타>는 1948년 쿠바의 아바나를 배경으로 야망에 찬 천재 피아니스트 겸 작곡가 치코와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는 가수 리타의 사랑과 열정, 질투와 욕망을 담아냈다. 두 사람의 러브 스토리는 아바나를 시작으로 뉴욕, 파리, 할리우드, 라스베이거스로 이어진다.  예술적 공감대로 만난 연인이 오해와 질투로 헤어짐과 만남을 반복하다 결국 영원한 사랑을 확인하는 이야기는 오랫동안 반복된 스토리지만 두 거장의 협연이 예술적 성취를 이뤄냈다. 2011 스페인 고야상 최우수 애니메이션 및 유럽영화상 애니메이션 부문을 휩쓸고 제84회 아카데미상 애니메이션 부문 후보에 오르면서 그 가치를 인정받았다.


1 마리스칼이 디자인한 바르셀로나의 도시 로고. 난독증으로 글자를 끊어서 이미지화하는 습관이 있어 ‘바르(Bar)’, ‘셀(Cel)’, ‘오나(Ona)’로 나눴더니, 각각 주점, 하늘, 파도를 의미하는 글자였다. 이 로고 덕에 바르셀로나는 자유로운 휴양 도시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2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 코비.

세상 모든 사람이
‘놀이’를 하도록

마리스칼은 한국에 대해 편안하고 행복한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특유의 호기심 어린 태도와 긍정적인 마인드로 한국에서 열리는 첫 전시회에 대한 기대를 내비쳤다.

“저는 한국어를 할 줄 모르고 이해하지 못하지만 지금 한국에서 매우 편안하고 행복합니다. 한국에서 만난 많은 분들이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 또 쓰고자 하는 것들을 잘 이해하고 공감해주기 때문이죠. 저는 이러한 감정이야말로 우리 모두가 소통할 수 있는 공통적인 언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에 오게 된 것을 진심으로 기쁘게 생각합니다. 저와 마리스칼 스튜디오에게 한국이라는 훌륭한 나라에서 전시하게 된 것은 더없이 소중한 선물 같습니다.”

마리스칼의 천진한 작품들이 한국 관객에게 던지는 메시지의 파장은 직선적이지만 울림이 깊다. 마리스칼이 관객들에게 하고 싶은 이야기는 딱 하나다. 놀이가 주는 풍요로움을 함께 느끼고 그 놀이에 동참하길 바라는 것이다.

“디자이너로서 제 역할은 세계를 더욱 아름답게 하는 창조물을 계속 만들어내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이번 전시를 통해 많은 분들에게 어떻게 제가 세상과 소통하는지, 어떻게 예술을 놀이처럼 즐기는지를 보여주고 싶습니다.”
 
취재 황유영 사진 조선일보D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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