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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소개

[신간안내]디자인, 메시지 전달자인가? 과소비 자극제인가?

[인문사회]디자인, 메시지 전달자인가? 과소비 자극제인가?
사물의 언어·데얀 수직 지음·정지인 옮김·334쪽·1만5000원·홍시

세 디자인의 공통점은? 조명 스탠드 티치오(왼쪽)와 폴크스바겐의 골프 GTI(오른쪽)는 독일 경찰들이 쓰던 발터 PPK 권총(가운데)과 ‘은밀하게’ 닮았다. 검은색 바탕에 빨간색을 미세하게 가미한 디자인은 불길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암시한다. 홍시 제공

탁상용 조명 스탠드 ‘티치오’는 바닥부터 위까지 모두 검은색인데 받침대에 달린 스위치와 회전 고리 부분만 빨갛다. 독일의 건축가 리하르트 사퍼가 디자인하고 이탈리아의 조명기구회사 아르테미데가 만든 작품이다. 이 드라마틱한 디자인의 역사는 1920년대에 독일 경찰을 위해 제작된 발터 PPK 권총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까만 발터 PPK 권총의 방아쇠울 뒤에는 빨간 동그라미가 있다. 이 빨간색은 안전장치가 풀리고 발사할 준비가 됐을 때만 보이는 실용적이고 위협적인 디자인이다. 1980년대 폴크스바겐의 골프 GTI 모델은 검은색 차체와 대비되도록 라디에이터의 테두리에 가느다란 빨간 선을 그려 발터 PPK를 연상시켰다. 발터 PPK의 원형을 디자인에 도입함으로써 불길하면서도 치명적인 매력을 암시한 것이다.

영국 런던의 디자인박물관 관장인 저자는 ‘디자인은 곧 사물의 언어’라고 풀이한다. 사물은 디자인으로써 메시지를 전달한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디자이너의 역할은 제품의 기능을 살리는 것뿐 아니라 이야기꾼이 되어 디자인이 메시지를 잘 전달하도록 이끄는 데도 있다. 그 수단 중 하나가 티치오와 골프 GTI에서의 ‘권총’처럼 원형을 떠올리게 하는 디자인이다. 원형은 이미 확립돼 있는 역사를 하나의 물건에 불어넣는다.

스티브 잡스가 맥북을 들고 있는 표지만 보고 이 책에서 산뜻하고 컬러풀한 디자인의 세계를 기대하면 안 된다. 저자는 장 보드리야르와 소스타인 베블런을 넘나드는 철학적 사유를 통해 오늘날 소비를 주도하는 디자인의 본질을 꿰뚫고자 한다. 그리고 매력적인 디자인에 이끌려 무분별한 소비를 합리화하는 현대인의 욕망을 경계의 시선으로 바라본다. 저자 역시 영국 히스로 공항의 매장에서 검은색 애플 맥북을 발견하고는 이미 갖고 있던 흰색 아이북보다 훨씬 ‘순결해 보인’ 나머지 구입해버리고 말았지만.

소설가이자 미술평론가인 존 버거는 저서 ‘바라보기의 방식’(1972년)에서 “홍보는 기쁨에 대한 자연스러운 욕구를 자극하는 데서 시작하지만 실제적인 기쁨의 대상을 제공하지는 못 한다”고 썼다. 저자는 이 말에서 ‘홍보’를 ‘디자인’으로 바꿔 써도 손색이 없다고 말한다. 새 아이폰이 나올 때마다 애플스토어 앞에 줄지어 밤새워 기다리는 사람들이나 고급 브랜드 매장에 도도하게 진열돼 있는 수백만 원짜리 핸드백에 자존심을 거는 사람들이라면 알 것이다. 그 매혹적인 디자인에서 얻는 기쁨은 순간일 뿐 얼마 안 가 새로운 아이템으로 바꿔줘야 한다는 사실을. 저자의 말을 빌리면 제품 디자인은 “잠시 동안 미모의 환상을 만들기 위해 이마의 주름살을 감춰주는 보톡스 주사 같은 것”이 되어버렸다.

디자인은 자칫 우리와 사물의 소박한 관계를 약물 남용처럼 왜곡할 수 있다고 저자는 강조한다. 무심한 소비주의에 길든 우리는 “어떤 물건이 쓸모없을수록 그 가치는 더 높아진다” “풍요의 시대에는 제대로 된 호사를 누리기가 더 어렵다”는 저자의 패러독스에 무릎을 치게 된다. 아버지의 낡은 타자기나 베트남전쟁 때 사진가들이 메고 다녔던 상처투성이 니콘 카메라에서 삶의 흔적이 부여해준 권위를 새삼스럽게 느끼면서.

신성미 기자 savoring@donga.com

기사입력 2012-02-25 03:00:00 기사수정 2012-02-25 09:00:56 동아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