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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디자인 거장, 그를 키운 건 난독증

바르셀로나 도시 로고 디자인으로 유명한 마리스칼
이 사람, 말보다 그림이 앞선다. 시선은 이리저리 빙그르르, 대화엔 좀처럼 집중을 못한다. 스페인 출신의 스타 디자이너 하비에르 마리스칼(Mariscal·61)은 어린아이처럼 산만했다. 아이가 손으로 쓱싹 대강 그린 듯한 그의 그래픽 작품처럼.

마리스칼은 올림픽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마스코트로 평가받는 1992년 바르셀로나 올림픽 공식 마스코트 '코비(Cobi)', 도시 로고의 표본으로 불리는 바르셀로나 시(市) 로고 등을 만든 디자인계의 거장이다. 아르테미데, 모로소 등 최고급 조명·가구업체의 제품도 디자인했다. '2011 서울디자인페스티벌' 참석차 처음으로 방한한 그를 최근 서울 삼성동 코엑스에서 만났다.

  하비에르 마리스칼(사진 왼쪽)과 바르셀로나는 술·하늘·파도의 도시… 마리스칼이 디자인한 바르셀로나의 도시 로고. 난독증 때문에 글자를 끊어서 이미지화 하는 습관이 있어 바르셀로나(Barcelona)라는 긴 단어를‘바르(Bar)’‘셀(Cel)’‘오나(Ona)’로 나눴더니 각각이 카탈란(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언어)으로 주점·하늘·파도를 의미하는 글자였다. 그래서‘BAR’엔 술을,‘CEL’엔 몬주익 언덕과 하늘을,‘ONA’엔 파도가 치는 바르셀로나 항구 모습을 그려넣었다. 이 로고 덕에 바르셀로나는 자유로운 휴양도시의 이미지를 갖게 됐다. /하비에르 마리스칼 제공

산만함이 신경 쓰였는지 마리스칼은 자신의 장애 얘기부터 꺼냈다. "10년 전쯤 영국에 유학 간 딸이 전화를 걸었더라. 학교에서 자기더러 난독증(難讀症·문자를 잘 판독하지 못하는 장애)이라 했다면서. 증세를 물어보니 나랑 똑같았다. 그때 알았다. 나 역시 심한 난독증이라는 사실을. 집중을 잘 못한다고만 생각했지 그런 병이 있다는 것조차 몰랐다."

갑자기 그가 기자의 수첩을 가져가더니 이마에 네모난 투명창이 있는 자기 얼굴을 그렸다. "어릴 때부터 버벅대는 말 대신 그림으로 표현하는 게 편했다. 지금도 사물을 이미지로 만들어 이 투명창 안에 입력한다."

유명세를 쌓은 계기가 된 바르셀로나 도시 로고는 역설적이게도 그의 난독증이 준 '선물'이었다. 1970년대 후반 바르셀로나에선 예술인을 중심으로 도시 정체성을 확립하자는 움직임이 일었다. 마리스칼은 그중 도시의 상징인 로고를 만드는 일을 맡았다.

"바르셀로나(Barcelona)라는 단어 자체가 너무 길어서 내 눈엔 한꺼번에 안 들어왔다. 내 방식대로 글자를 '바르(Bar)' '셀(Cel)' '오나(Ona)'로 끊어놓고 보니 카탈란(스페인 카탈루냐 지역의 언어)으로 각각 주점·하늘·파도라는 의미였다. 그래서 단어에 술, 하늘, 파도를 그려넣었다." 이 로고 덕에 바르셀로나는 술, 하늘, 파도의 도시라는 별명과 함께 자유로운 휴양 도시 이미지를 갖게 됐다.

  국제 행사 마스코트 중 가장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는 바르셀로나 올림픽 마스코트‘코비’(왼쪽)와 귀여운 그래픽으로 보드카 브랜드 앱솔루트를 위해 만든 포스터.

또 다른 출세작 '코비'에는 그만의 유머가 스며 있다. 양치기 개인 코비는 얼굴이 비대칭이면서 친근하다. "마스코트는 사람처럼 살아 숨쉬어야 한다. 항상 웃는 얼굴을 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 슬픈 표정, 힘든 표정의 코비도 만들었다. 기자, 카메라맨을 위해 만든 코비도 있었다." 그는 "코비를 만들 때 88서울올림픽 마스코트 호돌이도 참고했다. 좋은 캐릭터였지만 국제적이기보다는 아시아적이고 좀 강하다는 인상이 있었다"고 했다.

마리스칼은 신발회사 캠퍼, 의류회사 H&M과의 그래픽 작업, 스페인 방카하 은행 로고 디자인 등 기업의 브랜드 작업을 많이 했다. 그에게 한국 대표 기업들의 로고를 보여주고 냉정한 평가를 주문해봤다. 그는 "삼성은 깔끔하고 강한 이미지를 주고, LG는 기발하고 재밌어 처음 봤을 때부터 인상적이었다. 반면 현대차 로고는 혼다를 연상시키고, 기아는 특색이 없어 아쉽다"고 했다.

처음 온 한국에선, 이미지를 빨아들이는 그의 '투명창'에 뭐가 입력됐을까. 그는 우선 "한글"을 꼽았다. 그러더니 스마트폰에서 한글 키패드를 찾아 한글 자모를 무작위로 입력했다. "그래픽적으로 사각(四角) 틀에 채워지면 완성도가 높다. 이것 봐라. 한글은 한 자 한 자가 다 네모로 완결된다. 한글로 꼭 작업을 해보고 싶다." 또 다른 하나는 도로에서 본 'P턴' 표지판. "이런 표시는 처음 본다. 얼마나 융통성 있는 표시냐. 돌아갈 수 있다는 얘기 아니냐. 좌회전 우회전엔 금지 표시가 있지만 P턴은 금지 표시가 없지 않으냐. 내겐 긍정적인 신호라는 의미로 해석된다." 마리스칼은 자기의 투명창에 입력된 한국의 P턴 표지를 꺼내 노트에 그리고 있었다.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기사입력 : 2011.12.23 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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