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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사람들

모양·기능? 난 집착하지 않는다

▲ 톰 딕슨이 장난기 가득한 표정으로 거울처럼 반사되는 자신의 작품 '코퍼(Copper)' 조명 아래에 섰다.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英 대표 디자이너 톰 딕슨

기존과 완전히 다른 디자인… 그것이 나의 유일한 목표
1970년대 후반 런던. 첼시예술대학에 다니던 한 튀니지 출신 청년이 있었다. 공부에 별 흥미를 못 느낀 청년은 밴드에서 베이스를 치며 음악에 심취한다. 학업을 중단하고 공연 준비를 하던 어느 날 청년은 오토바이를 타다가 큰 교통사고를 당한다. 다리를 심하게 다쳐 결국 음악을 포기한 청년은 오토바이 튜닝을 하면서 익힌 용접술을 활용해 재미 삼아 자잘한 소품을 만들었다. 타이어, 핸들 등 버려진 자재로 꼬물꼬물 만들어댄 창의적인 제품은 이내 사람들 사이에 알음알음 알려졌다.

이 청년이 훗날 영국을 대표하는 톱 디자이너로 이름을 떨친 톰 딕슨(Dixon·52)이다. 2000년 대영제국 훈장(OBE)을 받았고, 뉴욕현대미술관(MoMA), 런던디자인뮤지엄 등에 작품이 소장돼 있다. 2002년부터 자신의 이름을 딴 가구 브랜드를 운영하고 있다. 최근 디자인가구 수입업체 '두오모' 초청으로 방한한 그를 서울 논현동 두오모 매장에서 만났다. 심한 곱슬머리, 황토색 트위드 소재 양복 차림이 악동(惡童) 이미지를 풍겼다. 파안대소(破顔大笑)는 없었지만 말끝마다 차가운 유머가 배 있었다. 보고 있으면 왠지 모를 웃음이 번지는 그의 작품처럼.

"뭐라도 좀 먹어야겠어. 한국 음식 아무거나 사와 줄래?" 자리에 앉자마자 가물가물 감기는 두 눈을 애써 크게 뜨며 직원에게 음식을 부탁했다. 방콕과 베이징에 갔다가 이날 서울에 도착한 그는 다음날 다시 마닐라로 떠날 예정이라 했다. "아시아 사람들에게 어떤 제품이 잘 팔리는지 궁금해서요." 그는 "어떤 디자이너는 제품 만드는 데에만 관심이 있지만 난 아니다"며 "때론 마케팅 담당자가 됐다가 홍보맨이 되기도 하고 기술자가 되기도 한다"고 했다.

인생을 바꿔놓은 오토바이 사고 이야기가 나왔다. 상처는 없냐고 묻자 "우리 인생이 상처투성이 아닌가"라고 웃었다. 왼손엔 전구에 데어 생겼다는 화상 자국이 선명했다. 두 번의 큰 교통사고를 당했지만 여전히 황동색 모토구찌(이탈리아산 오토바이)를 몰고 런던 시내를 활주한다. "오토바이는 자유를 줘요. 내 디자인과 일맥상통하지요." 톰 딕슨은 디자인 정규 교육을 받지 않았다. 그는 "무지(無知)가 디자인을 할 때 순수하게 배우려는 태도를 길러줬다"고 했다.

톰 딕슨 작품은 디자인을 지탱하는 두 요소인 형태미와 기능성을 골고루 갖췄다. 접시 모양 위성 안테나를 본떠 만든 옷걸이 '페그(Peg)'는 옷을 거는 부분이 둥그렇게 돼 있어 옷을 한참 걸어둬도 자국이 생기지 않는다. 대표작인 '미러 볼(Mirror ball)'은 구(球) 형태의 거울처럼 만든 조명. 작은 공간만 비추는 기존 스포트라이트의 한계에서 벗어나 넓은 공간에 부드럽게 빛을 비춘다. 1987년 톰 딕슨의 이름을 세상에 알린 계기가 된 출세작 'S체어'는 우연히 책상 위에 놓인 치킨 한 조각을 보다가 아이디어를 떠올렸다. 형태도 특이하지만 원래 이 의자는 앞 못 보는 이들이 부딪혀도 다치지 않게 고무로 만들었다.
 

▲ 반도체에 쓰이는 얇은 금속판으로 만든 조명 '에치(Etch)'<오른쪽 위 사진>와 접시모양 위성안테나에서 영감 받아 만든 옷걸이 '페그', 톰 딕슨의 출세작 'S체어'.(오른쪽 아래 사진) /두오모 제공

정작 톰 딕슨은 "작품을 디자인할 때 형태와 기능을 먼저 생각해본 적은 없다"고 했다. "항상 완전히 다른 디자인(something completely different)을 만드는 게 유일한 목표랍니다." 개인적으로 가장 아끼는 작품은 뭘까. "그 질문에 대한 대답은 항상 '내년에 나올 작품'이랍니다. 내 머릿속은 언제나 신선한 아이디어로 가득하니까."(웃음)

요리에서 아이디어를 자주 얻는다고 했다. 자신이 디자인한 런던의 '독 키친(Dock Kitchen)'에서 일주일에 한 번 요리를 한다. "요리에선 영양소를 담뿍 함유한 신선한 소재를 쓰는 게 가장 중요해요. 디자인을 할 때도 어떤 소재를 어떻게 쓰느냐가 제일 중요하지요."

IT 제품 디자인 경험은 없지만, 톰 딕슨은 "한국의 뛰어난 IT 회사들과 일해보고 싶다"고 했다. 그만의 방식대로 디자인하는 '완전히 다른' 휴대전화는 어떤 모습일까. "비밀"이라고 너스레 떨더니 입을 열었다. "모든 업체가 훌륭한 전화(good phone)에 성능 나쁜 카메라(bad camera)를 장착하고 있어요. 나라면 아주 성능 좋은 카메라(a really good camera)에 나쁜 전화(bad phone)를 부착하겠어요."

문득 가구 디자이너의 집이 궁금해졌다. "내 작품을 최소로 두는 게 철칙이에요. 타인이 만든 작품을 최대한 집에서 즐기자는 주의지요." 그는 자신의 수천만원짜리 가구 대신 프랑스인 증조할머니가 썼던 1820년대 장식장과 테이블을 집에서 쓰고 있다.


▲ ‘완전히 다른 무언가’를 디자인하려고 항상 고심한다는 톰 딕슨. /이진한 기자 magnum91@chosun.com

김미리 기자 miri@chosun.com 

기사입력 : 2011.10.12 0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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