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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sign Trend/패션

[김경의 트렌드vs클래식]디자인하지 않는 디자인

김경 월간 ‘바자’ 에디터

‘리블랭크’라는 리사이클링 디자인 그룹이 있다. 윤진서는 여성복을, 홍선영은 남성복을 만들고, 채수경은 그래픽 및 제품 디자인을 맡고 있는데 이들은 이른바 아무 생각 없이 버려진 헌 옷들을 통해 무한한 재창조의 가능성을 보여주는 재활용 디자이너들이다. 주로 ‘아름다운 가게’에서 기증받은 헌 옷이나 소파 천갈이를 하고 남은 가죽을 사용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재활용 의류를 만드는데 그 창조성이 기가 막히다. 컬러도 다르고 소재도 다른 각각의 옷들을 모두 해체해서 장인에 가까운 완벽한 테일러링 솜씨와 아방가르드한 젊은 감각으로 재구성한 이들의 컬렉션을 보고 있으면 눈물 날 정도로 감동적이다.

그런데 얼마 전 리블랭크가 주관한 물물교환 프로젝트 행사 ‘스위싱 나잇 서울’에 갔다가 나가오카 겐메이라는 일본 디자이너를 알게 됐다. 그는 일본에서 가장 큰 디자인 리사이클링 숍 ‘D&Department’를 설립한 사람으로, 디자이너임에도 디자인을 하지 않는 사람으로 유명하다. “디자이너가 새로운 디자인을 하지 않는다고 하면 마치 직무유기처럼 느껴지지만, 저는 디자이너가 과연 새로운 것을 낳는 것만으로 괜찮은가를 고민하는 사람입니다.”

리블랭크 초청으로 서울에 온 나가오카 겐메이의 강연을 듣고 있자니 오랫동안 독일의 가전업체 브라운사의 수석 디자이너로 일하면서 ‘굿 디자인’의 바이블 같은 제품들을 만들어온 디터 람스가 떠올랐다. 그도 비슷한 얘기를 한 적이 있다. 세상에 이미 훌륭한 디자인이 이렇게 많은데 굳이 새로 무언가를 더 디자인해서 옛것을 느닷없이 구닥다리로 만들며 디자인 공해를 만들 필요가 있느냐는 거였다. 그러면서도 디터 람스는 브라운사에서 무려 56년이나 근무하고 1998년(그가 66세 되던 해)에야 은퇴했으니 고민만 하고 새로운 디자인을 요구하는 시스템 안에서 그냥 안주하며 살았던 셈이다. 그런 점에서 나가오카 겐메이는 20세기 디자인 역사에 한 획을 그은 디터 람스보다 더 비범한 인물처럼 보인다. 그는 동네 철물점에 가듯 누구나 쉽게 갈 수 있는 리사이클링 디자인 잡화점 주인이지만, 싸구려라고 하더라도 잘 만든 옛날 물건을 잘 닦고 수리해서 다시 판매함으로써 ‘새로운 물건’이 아니라 ‘새로운 가치’를 만드는 디자이너이기 때문이다.

일본 최대의 디자인 리사이클링 숍 ‘D&Department’가 만든 재활용 쇼핑백.

오늘날 좋은 디자인이란 좋은 눈으로 새롭게 발견하는 데서 나온다고 믿는다. 그렇게 함으로써 세상에 이로운 것이어야 한다고 믿는다. 그런데 자본주의 시장논리는 그와 정반대다. 새로운 디자인을 빨리 빨리 유통시켜 기존의 제품을 구식으로 노화시키고 변용시켜야만 한다. 오늘의 것을 내일이면 오래된 것으로 만든다는 전략은 소비에 동기를 부여할 목적으로 끊임없이 계획되었고, 디자인은 그 역할에 맞추어 계속해서 제품의 외관을 바꾸어 나갔다. 특히 우리 한국 사회는 유행에 매우 민감한 사회여서 제품 교체 주기가 지구상 어느 나라보다 짧다.

그런 점에서 서울의 디자인정책 사업을 보고 있으면 화가 난다. 서울을 상징하는 광장답지 않게 폐쇄적이고 심지어 조잡하기까지 한 서울광장도 마음에 안 들고, 놀이동산 야간축제를 연상케 하는 반포대교 분수쇼도 마음에 안 들고, 멀쩡한 걸 떼어내고 새로 바꾼 맨홀 뚜껑도 마음에 안 든다. 그 중에서 마음에 안 들다 못해 심지어 분통 터지는 건 재래시장의 노후 환경을 개선하겠다며 일괄적으로 통일시킨 간판들이다. 예전에는 광장시장 같은 곳에 가면 옛날 시골장터 같은 훈훈한 분위기와 점포마다 개성이 단긴 간판들을 보며 미소 짓는 일이 많았는데, 이젠 별로 예쁘지도 않은 성형미인의 인공적 얼굴들만 즐비한 재래시장에서 간판을 보며 인상 찌푸리는 일이 더 많아졌다.

우리보다 30년, 아니 100년은 더 성숙한 디자인 의식을 자랑하는 일본에서는 이렇게 나처럼 정부에 불평할 일이 많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나가오카 겐메이의 책에서 다음과 같은 문구를 발견하고는 무척이나 반가웠다. “국가의 디자인 활동은 지긋지긋하다. 어디까지나 민간이 할 수 있는 것을 만들고 싶다.” 그래서 묻고 싶어졌다. 좋아하는 사람들끼리 모여 ‘버리지 않는다는 가치의 기분 좋음’을 나누고 싶다. 같이 하실 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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